[취재일기] 부활 꿈꾸는 사무라이 경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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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2면

한 사무라이의 아들이 떡을 훔쳐먹었다는 누명을 썼다. 집까지 찾아와 길길이 뛰는 떡집 주인이 돌아가자 사무라이는 침묵 끝에 아들에게 물었다.

"정말 그랬느냐" "아닙니다" . 사무라이는 아들을 떡집으로 끌고 가 목을 벴다. 그리고 주인이 보는 앞에서 배를 갈라 아들이 떡을 먹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시킨 뒤, 곧바로 주인의 목을 벴다.

섬뜩한 옛 이야기에서 읽을 수 있듯 쉽게 칼을 꺼내지는 않지만, 일단 칼집에서 칼을 뽑으면 반드시 피를 묻히고 끝장을 보는 게 사무라이의 금도 (襟度) 라고 한다.

요즘 일본 기업들이 추진중인 구조조정에서는 사무라이의 피냄새가 난다. 수천, 수만명씩 해고명단이 발표되지만 일본 열도는 너무 조용하다. 총파업도 없고, 노사정 (勞使政) 위원회도 없다. 회사.나라를 우선하는 강력한 공감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지난 한해동안 많은 일본 기업의 경영진이 바뀌었다. 기존 인맥과 관련없는, 국제감각을 갖춘 뉴페이스들이 칼자루를 잡았다.

칼끝은 지난 9년간 회사를 구렁텅이에 빠뜨린 최고 경영진의 목부터 향한다. 유통그룹 다이에는 오너사장과 그의 큰 아들 (부사장) 부터 목을 쳤다.

"이러지 않고는 죄없는 사원의 목을 칠 수 없다" .다이에의 대답에는 아들의 배를 가르는 사무라이의 독한 표정이 읽혀진다.

요즘 일본 경제는 조롱의 대상이다. "사무라이 경제는 이미 관속에 들어갔다. 못박는 일만 남았다" "자신의 몸도 지탱 못하는 괴물" .일본경제의 미래가 없다는 것은 더이상 뉴스가 아니다.

한국 경제학자들도 "일본은 한국에 비해서도 금융.기업 구조조정이 1년은 늦었다" 고 비야냥이다.

일본에는 "태풍이 불어야만 흔들리는 풀과 튼튼한 나무를 구별할 수 있다" 는 속담이 있다. 지금 일본에는 구조조정의 태풍이 불고 있다. 사무라이 경제가 풀처럼 쓰러질지, 아니면 '잃어버린 10년' 을 딛고 화려하게 부활할지 좀더 지켜볼 일이다.

이철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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