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인물] 김영배 국민회의 총재대행 지명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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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고집은 세지만 정치를 만들어내는 정치인. " 김윤환 (金潤煥.허주) 전 한나라당 부총재가 김영배 국민회의 총재권한대행 지명자에 대해 붙이는 평가다.

김대중 대통령이 평민당 총재 시절인 90년 13일 단식농성을 할 때 金지명자는 평민당 총무였고, 민자당 총무였던 허주는 그 파트너였다.

金지명자는 허주를 상대로 내각제 개헌 포기, 30년만의 지방자치제 부활 등을 관철해냄으로써 DJ의 단식중단 계기를 마련했다.

DJ는 자신이 인정했던 '명총무 김영배' 를 9년만에 자신을 대신해 당을 지휘할 위탁관리자로 내보냈다.

허주의 말대로 판을 깨지 않으면서도 고집을 관철시키는 게 金지명자의 강점. 이런 장기는 조직이 어려울 때 진가를 발휘했다는 주변의 평가다.

87년 통일민주당 초대 사무총장.평화민주당 초대 사무총장 등을 지내 '창당 기술자' 로도 불린다.

5공 (共) 말기인 87년 신민당 당기위원장으로 당론에 반하는 내각제를 주장한 이철승.이택희씨를 징계하기 위해 생선회칼로 무장한 폭력배들이 진을 친 당사를 뚫고 들어갔다.

벗겨진 이마에, 짙은 눈썹 외에도 이같은 당찬 행동 때문에 사무라이란 별명이 붙여졌다.

하지만 그의 의원회관엔 칼은 없고 붓만 있다.

80년대 4년간의 정치방학 시절 서예에 심취했고, 갈고 닦아 개인작품전을 낼 수 있을 정도. 초등학교 때 일본인 교사의 지시로 전교생 중 혼자 겨울 얼음물에 뛰어든 일화도 있다.

6.25 당시 고향 (충남 논산)에서 인민군으로 끌려가다 소금 한바가지를 날로 먹고 꾀병을 부려 빠져나온 뒤 국군에 자원입대하는 등 임기응변도 능하다.

68년 김재광 (金在光) 의원 밑에서 정치수업을 시작한 그는 70년 신민당 전당대회 때 이철승계와의 비밀협상을 벌여 약세인 DJ가 YS (金泳三 전 대통령) 를 누르고 대통령 후보로 뽑히는데 기여했다.

국민회의 내에선 대개 "자기 입장이 분명하다" (鄭東泳대변인) , "강직하고 의리가 있다" (張永喆정책위의장) 는데 이의가 없다.

"한번에 통과된 원고가 없을 정도" (보좌진) 로 완벽주의자여서 "지나치게 신중하고 세심하다" 는 평가도 있다.

고교 (영등포공고) 졸업이 최종학력인 것이 DJ와 공통점. 두루 친하지만 계보를 만들지 않는 처신은 그동안 동교동계의 견제를 받지 않으면서 당내 중진으로 클 수 있었던 비결.

이상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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