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춤양복' 가격파괴.출장제작 몸부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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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칠순 잔치를 하는 가족이 양복을 맞추면 할아버지 양복을 무료 (한 달에 선착순 5명) 로 해드립니다. 잔치 사회도 양복점 주인이 직접 봐드립니다' '신사복 한 벌을 19만5천원에 맞춰 드립니다. 혼방 50%는 7만원입니다' 국제통화기금 (IMF) 이후 맞춤양복 업체들이 가격인하, 특별 이벤트 등을 펼치며 '살아남기' 에 안간힘을 쏟고있다.

38만원대 양복을 17만원에 해주고, 고희를 맞은 할아버지는 무료로 맞춰준다는 카드를 들고 나온 골덴양복점 박철민 (朴哲民.54) 사장은 "손을 놓으면 도급제로 일하는 기술 직원들이 큰 타격을 받게된다" 며 "이윤이 적더라도 우선 일감을 만들어보자는 뜻" 이라고 설명했다.

70년대만해도 의례 맞춤양복이었던 것이 90년도 들어서는 기성복에 밀려 시장점유율이 51%로 뚝 떨어졌다. 그나마 96년에는 13%로 떨어졌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IMF는 직격탄을 날렸다.

(사)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김노호 (金魯湖) 사무국장은 "1만2천 개이던 맞춤양복점 수가 IMF이후 8천 개로 줄어들었다" 고 전한다.

실제 서울시내에서 손꼽히는 유명 맞춤양복점들도 주고객인 중소기업 사장들의 발길이 끊기면서 어려움을 겪을 정도. S양복점의 한 관계자는 "경제가 어려우면 가장 먼저 남성들이 자신에게 쓰던 비용을 줄이는 것 같다" 고 말한다.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는 지난해 말 현재 맞춤양복 시장규모는 4천억원, 총 4만여 명이 맞춤양복업에 종사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문제는 살아남은 양복점들의 채산성도 날로 악화한다는 점. 판매가 80만원인 최고급 양복의 경우 원단 12만원.부자재 3만원.공임 30만원 등 45만원 정도의 직접 생산비가 쓰인다.

기타 매장 임대료.관리비.접대비 등을 제외하면 한 벌당 순이익은 15만~20만원을 넘지 않는다. 그나마 수입에 의존하는 원부자재 값이 올라 순이익은 계속 주는 형편.

맞춤양복업체들은 이에 따라 공임을 동결하고 가격인하를 하는 등 다양한 노력을 펴고있다. 그 대안의 하나로 꼽히는 것이 '시스템 오더' 제도. 시스템 오더는 여러 치수의 양복 패턴을 미리 만들어 놓고 고객의 신체 치수를 잰 후 미리 만들어진 패턴을 수정해 양복을 만드는 방식이다.

이 경우 고객은 굳이 '가봉' 이라는 번거로운 단계를 거치지 않아도 되고 훨씬 저렴한 값에 맞춤식 양복을 마련할 수 있다. 업체로서는 대량생산으로 생산단가가 적게 들고 경우에 따라서는 프랜차이즈나 무점포 판매까지도 가능하게 된다.

3년 전부터 시스템 오더제로 양복을 생산하고 있는 (주)에피모 윤인중 대표는 "일본은 시스템 오더의 시장 점유율이 20%" 라며 국내에서도 이것이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내다본다.

에피모는 조지오 아르마니.휴고 보스 등 외국 유명 브랜드의 패턴을 연구하는 등 기술개발에 힘을 모으고 있다. 또 TV홈쇼핑으로 38만원권 양복 티켓을 판매하기도 한다. 소비자가 카드로 티켓 결제를 마치면 양복점에서 패턴을 들고 출장 나가 양복을 맞춰 주는 방식이다.

서울 맞춤양복 상권은 크게 세 곳으로 나뉘는데 A급은 주로 서울 소공동.충무로.명동과 강남 각 호텔에 자리하고 있고 B급은 서울 충무로 4가와 인현동 부도심 지역에, C급은 도시의 외곽지대에 주로 자리하고 있다.

순모기준으로 A급은 80만원, B급은 70만원, C급은 55만원 정도의 가격대. 주로 C급 양복점들의 타격이 심하다. 일부에서는 10만원대 맞춤양복까지 내놓고 있는데 품질에 의문을 제기하는 업체들도 있다.

그러나 미래를 어둡게만 보지 않는다. 맞춤양복은 기성복과는 비교할 수 없는 '품질' 을 갖추고 있다는 자신감 때문이다.

실제 인터컨티넨탈 호텔.라마다르네상스 호텔에 매장을 두고있는 잉글랜드 양복점의 고경호 (高慶昊) 사장 (한국복장기술경영협회 회장) 은 "최고 시장은 아직도 맞춤양복이 차지하고 있다" 며 "기술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더 이상의 고객 이탈은 없을 것으로 본다" 고 내다봤다.

이경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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