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무의 기본은 인간관계, 야당과 오해 없는 게 중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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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이명박 대통령이 중폭 개각을 단행했다. 개각에선 특임 장관직이 신설됐다. 소통과 통합의 임무를 맡을 거라고 한다. 특임 장관에 내정된 주호영 후보자를 인터뷰했다. 다음은 중앙SUNDAY 기사 전문.

주호영(사진) 특임장관 후보자가 이명박 정부 2기 내각에서 소통과 통합의 임무를 부여받았다. 특임장관은 1998년 정부조직법이 바뀌면서 폐지됐던 정무장관직이 11년 만에 명칭을 바꿔 다시 신설된 것이다. 그래서 그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할지 더욱 관심을 모은다.

주 후보자는 2007년 한나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당시 이명박 후보의 비서실장을 맡았다. 그때 이 대통령이 그를 비서실장으로 영입하기 위해 삼고초려를 했다는 얘기는 유명한 일화다. 특임장관 발표가 있은 다음 날 오후 그를 서울시내 한 커피숍에서 만났다.

-느낌이 어떤가.
“중책을 맡았다는 생각뿐이다. 정무 기능이 본래 어렵다. 일반 부처는 예산 사업이니까 그걸 집행하고 추진하면 되지만 정무는 기본이 인간 관계다. 내가 심부름을 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아마 그 자체부터 갈등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력한 만큼 성과가 나올 것으로 믿는다.”

-대통령의 지지율이 오르고 있다. 상승의 원인이 무엇이라고 보나.
“솔직히 지난해 한 해는 촛불시위의 여파로 일을 하고 싶어도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집권 초기에는 그 뜻을 펼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제 그립이 제대로 잡힌 것 같다. 촛불이 아니었으면 지지율이 더 빨리 올라갔을 것이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이나 인사 스타일에 변화가 느껴진다고들 한다.
“대통령의 생각이 크게 바뀌시지는 않은 것 같다. 다만 세팅이 좀 늦어져 발동이 늦게 걸린 것인데 이제는 탄착군이 제대로 형성돼 방향성도 좋아진 것 같다.”

-특임 장관이면 야당과의 관계가 중요할 텐데.
“야당과의 관계를 잘하는 데 정답은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서로 간의 오인 사격이 없어야 한다. 오해가 없어야 한다는 얘기다. 서로 진심을 얘기하면 생각의 격차가 많이 좁혀진다. 어디든지 자주 달려가 만나고 할 것이다. 항상 숙이는 자세로 임할 것이며 충실한 전령이 돼야 하지 않겠나.”

-대통령과 가깝다는 소리를 듣는데 대통령과의 사이에 남다른 점이 있나.
“사실 이 대통령과는 특별한 인연이 없다. 가까이서 모신 것은 경선 때가 처음이었다. 당시엔 최대한 편하게 해 드리려 했다. 돌이켜보면 비서실장으로 대통령을 모시면서 크게 꾸지람을 들은 기억은 없다. 사실 대통령 주변에선 꾸지람을 많이 듣는 사람이 실세라고 하는 농담도 있지만 말이다.”

-특임장관으로 어떤 역할을 하게 되나.
“정무적인 역할도 하겠지만 다른 일도 많을 것 같다. 명칭이 그래서 정무장관이 아니라 특임장관 아니겠나. 남북 관계를 정상화하는 일, 종교계와의 소통도 중요하다. 사회에 갈등이 있을 때 조정하고 해결하는 일도 잘해야 할 것이다. 내가 판사 출신이어서 양쪽의 말은 잘 듣는 편이다.”

-이 대통령이 8·15 경축사에서 선거구제 개편에 대한 의지를 표했다. 그런데 중대선거구제 개편은 노무현 전 대통령이 줄기차게 주장한 것인데.
“불교에 낙처(落處)가 다르다는 말이 있다. 같은 얘기라도 떨어지는 지점이 다르다는 것이다. 두 분이 비슷한 얘기를 하고 있는 것 같으나 정치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이다. 중대선거구제를 하게 되면 영남에서는 민주당 의원이 당선될 수 있으나 호남에선 한나라당 의원이 당선되기 어렵다는 분석이 있다. 노 전 대통령 입장에선 정치적으로 손해 볼 게 없는 것이지만 이 대통령 입장에선 반대다. 이 대통령은 선거구제 개편을 한나라당이 손해 보더라도 국민이 원하면 하자는 취지 아니냐. 낙처가 분명히 다르다.”

-유일한 40대 장관으로 나와 있다.
“(웃으며) 사실 50대다. 나는 1959년 11월생이다. 그러니 꼭 쉰 살이다. 호적에 1년 늦게 올려 그렇다. 예전에 그런 일이 좀 있지 않았나.”

-불교계와 인연이 깊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나.
“어린 시절 울진 읍내로 이사를 갔는데 집에서 20m 떨어진 곳에 동림사가 있었다. 그 절 마당이 내 놀이터였다. 거기서 스님들에게 반야심경도 배웠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무시험 추첨으로 갔는데 대구 능인고에 배정됐다. 능인고는 조계종 종립 재단 학교다. 자연스레 불교와 가까워졌다.”

그는 어린 시절 육사 지망생이었다고 한다. 20년 가까이 판사 생활을 하고 17대 총선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주 후보자는 사실 군인이 되고 싶었다고 했다. 그 꿈은 고교 시절 시력이 나빠지면서 무산됐다. 그래서 법대를 갔고 판사가 됐다. 언론에서 그를 평하는 프로필을 살펴보면 주로 합리적이고 온화하다는 평을 많이 한다. 하지만 그를 잘 아는 이들은 “참 독하다”는 말을 한다고 한다.

일화가 있다. 98년 영덕지원장으로 근무할 때 교통사고를 당했다. 다리·두개골 등 10군데가 부러지는 중상이었다. 뇌수가 흘러내릴 정도였다. 진단은 16주가 나왔고 13시간 수술했다. 그때 그는 부러진 다리를 들고 현장을 챙겼다고 한다. 경찰에 신고도 하고 법원 당직실까지 전화를 했다고 한다. 주변에서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그가 군인이 되겠다고 꿈을 꾼 이면에는 이 같은 근성이 숨어 있어서가 아닌가 싶다.

신용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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