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361. 아라리난장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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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제7장 노래와 덫

배타적 경제수역에서의 어획 할당량이 절반이 넘게 줄어든 결과를 낳은 한.일어업실무협상이 타결된 이후 강원도 연안 포구의 분위기는 시름에 빠져 어수선하면서도 냉랭했다.

이제 연근해 조업은 초토화될 것이라는 것이 어부들 사이에 떠도는 소문이었다. 그 중에서도 장어통발과 대게저자망 어선들은 장차는 조업을 포기하고 폐업에 들어가야 할 지경이었다.

남해안이 주 어장인 장어통발 어선들의 어장 규모는 명맥 유지가 의심받을 정도로 줄어든데다 어선에 달아야 할 통발의 숫자가 절반 이상으로 제한되고 말았다.

동해의 대게잡이도 저자망에서 저인망으로 바뀌게 되었는데, 그물을 바다 밑바닥에 깔았다가 거둬들이는 저자망에서 그물을 던져서 거둬들이는 저인망의 조업방식으로썬 날아가는 놈 위에 업혀가는 재간이 있는 어부들이라도 게를 잡을 수 없었다.

더욱이나 저자망 대게잡이로 어항 경기를 유지해왔던 죽변항이 받아야 할 타격은 컸다. 우리나라 대게 생산의 대부분이 실제로는 죽변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었다.

연승이나 채낚기 어선으로 옥돔이나 갈치를 잡는 제주해역의 조업도 타격받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들 어종은 대개 일본수역 안에서 잡혀 왔었는데, 협상 결과에 따라 입어절차가 까다롭게 되었다.

재래식 어구와 조업방식인 우리 어선에 입어절차가 까다롭게 되었다는 것은 입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말과 다를 것이 없었다. 오징어와 명태를 잡아 왔던 대화퇴어장 역시 조업수역이 종전보다 반으로 줄어들고 말았다.

이른바 배타적 경제수역의 경계선이 대화퇴어장을 반으로 갈라 놓은 결과였다. 전국에 산재한 5백여 척의 오징어채낚기 어선들은 반 이상이 조업을 포기할 판국이었다.

게다가 쌍끌이 어선단들도 성어기인 3월에서 6월까지 조업기간에 입어를 할 수 없게 되어 그 해역에서 돔이나 우럭을 잡아 연명하던 남해안 어민들은 이제 입에 풀칠조차 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강원도 근해 채낚기 어선들이 명태와 대구나 우럭을 잡을 수 있도록 저자망 겸업 허가를 내준다 하더라도 다른 지역 게통발 어선들이 강원도 동해안 지역으로 몰려들 것이 뻔하기 때문에 손실은 어차피 동해안 어민들의 몫이 되고 말았다.

누대를 바다에 기대어 살아 왔고, 그 텃밭에서 일용할 양식을 빌려 왔던 어부들은 매일같이 바다로 나와 바다에 탄식을 쏟아 부었다. 바다가 소중하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지만,가슴에 맺히는 포한과 원망을 또한 바다에만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바다만이 유일하게 말이 없었기에 방파제로 나와 매운 소주를 삼키며 뒤틀린 심사를 토하고 달래는 것이었다. 시절에 따라 황태와 오징어를 구색 맞춰 팔아 왔던 한씨네 행중이 받아야 할 타격은 결정적이었다.

대화퇴어장에서 조업해 왔던 5백여 척의 어선들 중에서 절반이 넘게 조업을 포기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일본수역 안에서 조업해 왔던 오징어채낚기 어선들과 유자망통발 어선들의 연간 위판금액이 반으로 줄어들 조짐이 역력했다.

한.일 중간수역에서 조업하던 어선들이 일본에 나포되고 있는 것도 어부들의 뒤통수를 치는 근심거리였다. 자신들이 몸소 당하는 횡액은 아니라 할지라도 그런 소식이 들려 오면, 어민들은 공연히 기가 질리고 앞날이 막막해지는 것이었다.

한 시간 앞의 장래를 점칠 수 없는 것이 바다 위를 헤집고 다니는 어선이었다. 모처럼 나타난 고기떼를 정신없이 따라가며 조업하다 보면, 자신들도 미처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에 경제수역을 넘어 버리곤 하였기 때문이었다.

라니냐 현상으로 한류 어종이 잡히지 않아 조업이 위축된 위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장까지 차단되고 잠식되자, 한류 어종이나 일본수역에서 잡히던 어물을 취급하는 중간상인들은 매물조차 내놓기를 꺼리는 눈치였다.

미상불 도매금을 올려 받아내려는 속셈이었고, 수산물의 도매금이 뛰면 노점 행상들의 몫이었던 보잘것없는 잇속도 응당 줄어들 게 마련이었다. 잡초에도 이름은 있고 철부지에게도 몫이 있는 법이라지만 그게 손쉬운 것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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