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詩)가 있는 아침 ] - '토막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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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정양(1942~ ) '토막말' 전문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놓고 간 말
썰물 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씩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바다
저만치서 무심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텅빈 가을 바닷가 모래밭에 새겨놓고 간 '정순아보고자퍼서죽껏다씨펄'. 이 대책없는 한 마디의 말이 에로스의 실체임을 알 수 있다.

한 남자가 여자를 사랑하게 되는 본능은 부나 명예나 권력에 앞서 천하를 얻는 것과 같지 않을까.

송수권<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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