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철호의 도쿄에세이]'비나이다…복을 주소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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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도쿄 (東京) 우에노 (上野) 부근에 있는 유시마 (湯島) 신사. 이 신사에는 학문의 신 (神) 이 깃들여 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래서 대학시험은 물론 사내 승진시험에 붙게 해달라고 기원하는 복표 (福票)가 나뭇가지마다 총총 걸려있다.

그러나 올해 이 신사를 찾는 참배객은 줄어들었다.

대신 재물 (財物) 을 부르는 신이 들어있다는 신사들에는 연초부터 참배객들로 북적거렸다.

일본경찰청 조사에 따르면 1일부터 사흘간 일본 전역의 정월 신사참배 (하쓰모우데) 객은 8천8백11만명으로, 전년 대비 1백17만명이 늘어났다.

74년 이후 최대의 인파다.

복을 비는 일본 전통은 유별나다.

정월 초하루면 대문마다 잡귀를 물리친다는 소나무가 내걸리는가 하면 시장 입구에 세워진 간이 신사를 그냥 지나치는 사람들도 없다.

장기불황과 고 (高) 실업의 고통 속에서 요즘 일본의 기복 (祈福) 열풍은 절정에 달하고 있는 느낌이다.

소비불황으로 백화점의 전체 매출은 줄어들었지만 복주머니만은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1만엔짜리 복주머니에는 새해 행운을 비는 첫 상품이라는 의미가 각별하다.

특히 공정거래법의 경품제한 조항이 풀리면서 유럽여행.자동차 등 값비싼 경품을 내건 백화점일수록 요행수를 노린 고객들로 붐볐다.

일본 TV들도 앞이 보이지 않는 답답함 탓인지 연초부터 점성술사들을 등장시키거나, 생활풍수 (風水) 를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쏟아냈다.

일본 관료.정치인의 올해 신년사는 마치 기도문을 읽는 기분이다.

미야자와 기이치 (宮澤喜一) 대장상은 "안개속을 지나면 푸른 하늘이 있고, 그곳에는 무지개가 뜰 것" 이라고 말했다.

일본인들의 간절한 기도가 하늘에 닿을지는 좀더 지켜볼 일이다.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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