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땅의 국수를 찾아서 ⑨ 강릉 메밀묵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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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수는 채소로만 끓이고 매콤한 양념장으로 간 맞춰
즐겨 찾던 고 정주영 회장“남겨선 안돼” 싹싹 비워

강릉에선 제사상과 차례상에 메밀묵을 올린다. 강릉의 시장통에 가면 거무스름한 메밀묵을 몇 모씩 파는 가게들이 있는데, 이들은 이걸 제수용으로 준비해둔다고 했다. 중앙시장의 식료품점인 교동상회 주인 이선녀(58)씨는 “요즘 메밀묵은 중국산 가루를 써서 옛 맛과 달라졌는데도 여전히 강릉 사람들은 제수용으로 메밀묵을 찾는다”고 했다.

이처럼 제사상에 메밀묵을 올리는 전통에서 나온 음식이 ‘메밀묵채’ 또는 ‘묵채국수’로 불리는 음식이다. 이 메밀묵채를 처음으로 돈을 받고 판 것은 20년 전부터 강릉 송정에서 송정해변막국수집을 하고 있는 김진남(72)·김진자(69) 자매였다.

“제사 지낸 다음 밥을 먹잖아. 그때 제상에 올린 무국에 도라지·고사리나물을 국물째 붓고, 거기에 메밀묵을 잘게 썰어서 훌훌 말아 먹었지. 이걸 사람들은 그냥 제사 때 먹는 메밀비빔국수 정도로 불렀지. 그걸 막국수집을 열면서 메밀묵채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거야.”

김진남씨는 매밀묵채의 유래를 이렇게 설명했다. 이른바 ‘강릉의 헛제사밥’이 된 것이다. 하지만 모양새는 제사가 끝난 뒤에 먹던 그대로는 아니었다. 먹기 좋게 잘게 썬 메밀묵 가락에 김치를 썰어 올리고, 그 위에 양념장·김가루·참깨가루를 올린 다음, 육수를 부었다. 메밀묵채는 원래 메밀막국수집의 ‘서브 메뉴’로 시작됐다. 그러다 1990년대 이후 강릉에 막국수집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부터 함께 대중화됐다.

멀건 무국에 말아먹던 제사음식과 달리 요즘 메밀묵채는 ‘자극적인 맛’을 낸다. 김진자씨의 뒤를 이어 2대째 음식점을 맡고 있는 장재화(36)씨는 “솔직히 육수나 비빔양념에 조미료를 조금 섞는다”고 말한다. 예전에 비해 사람들 입맛이 그렇게 변했기 때문에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장씨의 말대로 강릉 메밀묵채의 맛은 육수와 양념장에서 나온다. 육수는 고기를 전혀 넣지 않은 채소만으로 맛을 낸다. 무·양파·대파·버섯 등을 넣고 푹 끓이면 연한 풀잎 색의 육수가 만들어지는데, 냉면 육수처럼 얼음이 둥둥 뜰 정도로 차게 보관한다. 순 채소 육수지만, 맛은 아주 짭조름하다. 조카를 도와 아직까지 가게 주방을 맡고 있는 김진남씨는 “예전에는 멸치를 넣었는데, 요즘은 비린내 때문에 넣지 않는다”고 한다. 여기에 양념장을 가미한다. 까칠한 질감에 떫은 맛을 내는 메밀은 종종 ‘밍밍하다’는 평을 듣기도 하는데, 양파와 대파를 갈아 고춧가루를 버무린 매콤한 양념장이 이를 보완해준다. 어른 손가락만 한 길이에 나무젓가락 정도의 너비로 썬 메밀묵채 위에는, 김치를 송송 썰어놓는다.

메밀묵채에서 빠질 수 없는 게 메밀묵이다. 김진남씨는 “메밀묵이 막국수 만드는 것보다 훨씬 고되다”며 “불을 때면서 일일이 주걱으로 저어주어야 하기 때문”이란다. 현재 송정해변막국수는 20년 가까이 초당의 한 가정집에서 메밀묵을 받아쓴다. 이어 “예전 강릉에는 집에서 묵을 만들어 내다파는 사람들이 많았는데, 요즘은 드물다”고 했다.

강릉 토박이들 중엔 메밀묵채로 점심을 때우는 사람들이 많다. 장재화씨는 “주로 농부들이 좋아하는 음식으로 점심 시간에 일하는 복장으로 와서 메밀묵채를 먹고 가는 농부들이 종종 있다”고 전했다.

송정해변막국수는 메밀로 만든 음식을 무척이나 좋아했던 고 정주영 현대그룹 회장이 자주 들른 집이기도 하다. 가게 앞에는 정 회장과 김진남·김진자 자매가 함께 찍은 사진이 걸려 있다. 장씨는 “정주영 회장은 막국수와 묵채를 즐겨 드셨는데, 늘 ‘음식을 남겨서는 안 된다’고 얘기하곤 했다. 이 때문에 정 회장 일행이 먹고 간 테이블은 면발 찌꺼기 하나 없었다”고 말했다.

김씨 자매가 시작한 이 집의 메밀묵채는 현재 2세대들이 맛을 이어가고 있다. 강릉을 포함해 성남·김포에 총 4곳의 가게가 있는데, 이들 모두 두 자매의 아들·딸들이 운영하고 있다.

김영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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