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란 후 팔린 '알짜 기업들' 지금 누구 손에] 中. 외국계도 장기 투자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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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1월 영국계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이 인수한 제일은행의 분위기가 사뭇 달라졌다. 뉴브리지캐피탈이 주인이었던 지난 5년과는 영 딴판이다. 우선 장기간 투자가 필요한 기업대출을 적극 늘려나갈 방침이다.

제일은행은 1999년 뉴브리지가 경영권을 장악한 뒤 주택담보대출만 17조원에 달하는 소매은행이 돼버렸다. 위험하다는 이유로 기업대출을 꺼렸기 때문이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도 "(뉴브리지에서) 선진금융 기법을 배우는 데 실패했다"고 자평할 정도였다.

SCB가 인수하자 제일은행 이사회 구성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외국인이 70%를 넘던 이사회는 내.외국인이 각각 5명으로 균형을 이뤘고, 이사회를 경주의 관광단지에서 열던 관행도 없앴다. 대신 "그룹의 성패가 제일은행 경영의 현지화에 달려 있다"면서 직원들과의 화합을 위해 노력 중이다. 같은 외국계 투자자이지만 이렇게 차이가 나는 것은 자본의 성격이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뉴브리지는 최대한 이른 시간 내 투자원금을 회수하고 수익 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사모펀드(PEF)다. 반면 SCB는 한번 진출하면 길게는 수십년 동안 영업하는 전략적 투자자다.

부실 기업 매각 시장에서 토종 기업들의 주도권이 점차 강화되는 가운데 외국계가 인수하는 경우에도 단기펀드보다는 장기투자자의 비중이 커지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을 사들인 외국 자본의 73%가 5년 이상 장기 투자한 것으로 집계됐다.

◆ 장기 투자자 기여도 높아=굴착기를 만드는 스웨덴계의 볼보건설기계 본사는 한국에 있다. 98년 여름 삼성중공업의 건설기계 사업부문을 인수하면서 한국을 전략 거점으로 삼은 것이다.

이 회사는 선진 경영시스템을 바탕으로 매각 2년 만에 적자 살림을 흑자로 돌려 놓는 등 수익성이 크게 개선됐다. 이 때문에 외국인에게 팔린 기업 중 성공 모델로 꼽힌다. 이 회사 김희장 팀장은 "담당자들에게 권한을 대폭 이양하고, 10개에 달했던 주력 상품을 굴착기에 집중하면서 회사의 체질이 달라졌다"고 말했다.

외국계 장기 투자자들은 기업 효율성을 높이고 소비자들의 선택 폭을 넓히는 데도 기여했다. 씨티은행 등은 국내에 생소했던 프라이빗뱅킹(PB)과 신용대출 기법을 금융계에 확산시켰다. 특히 씨티가 처음 내놓은 주가지수연동예금은 이후 금.환율연동예금으로 발전했고, 은행.증권 등의 신상품과 서비스 개발 경쟁의 도화선이 됐다.

주주 권리와 기업가치를 중시하는 경영관행을 정착시킨 것도 외국자본의 공으로 꼽힌다.

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시중금리의 절반을 밑돌던 상장사 주주들의 배당수익률은 외국인 투자가 본격화하면서 꾸준히 높아져 지난해엔 처음으로 시중금리를 웃돌았다.

UBS캐피털 컨소시엄이 대주주인 위니아 만도 관계자는 "매출보다 현금흐름을 중시하는 쪽으로 경영이 바뀌면서 불필요한 일에 돈 쓰는 일이 줄고 경영투명성이 높아졌다"고 말했다.

◆ 외국자본 매도는 곤란=이처럼 외국자본의 공이 많지만 일부 국민의 시선은 여전히 곱지 않다. 최근 뉴브리지와 론스타 등 일부 단기자본의 조세회피 논란 등이 국민정서를 자극한 탓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금융.학계 전문가들은 단기자본의 일부 부작용을 외국자본 전체로 일반화하면 안 된다고 지적한다. 한 시중은행장은 "국내에 뿌리내리고 고용과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자본은 국내 자본과 다름없다. 문제가 있는 단기자본은 법규에 따라 정당하게 처벌하면 된다"고 말했다.

연세대 조하현(경제학) 교수는 외국자본의 진출을 프로농구에 비유했다. 그는 "각 팀에 외국인이 뛰면서 한국 선수는 줄었지만 경기가 훨씬 흥미진진하고 센터와 가드의 역할도 명확해졌다. 외국자본 진출이 비즈니스 체질을 바꾸고 경쟁력을 높이는 경우도 적지 않다"고 강조했다.

정부도 외국자본을 백안시하는 풍토를 경계하고 있다. 한덕수 경제부총리는 최근 "외국자본이 정당한 절차를 거쳐 적법하게 수익을 얻는다면 문제삼아선 안된다. 정부 내에선 '국부 유출'이란 말을 쓰지 않기로 했다"고 밝혔다. 윤증현 금융감독위원장도 "국적 구분없이 공정한 경쟁 기회를 보장하고 불공정 행위는 엄벌하겠다"고 강조했다.

◆ 특별취재팀= 김동호.나현철.김창규.김준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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