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악한 거미도 살신의 모성애'기존학설 뒤집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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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포악하기로 유명한 거미중에도 헌신적인 모성애를 가진 거미가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미국 위스컨신대 김길원(金吉源. 동물행동학) 박사는 어미 비탈거미가 자발적으로 새끼들이 먹이가 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는 기존의 연구 결과를 뒤집는 것. 오스트리아의 생물학자인 에반스 등은 95년 과학전문지 '네이처' 를 통해 어미의 이런 행동을 두고 단순히 늙어 죽을 때 혹은 생식이 더 이상 불가능할 때가 되면 새끼들이 어미를 먹이로 인식해 일어나는 현상이라고 설명했었다.

그러나 김박사는 비탈거미에 대한 연구 논문에서 어미가 수십 마리에 달하는 새끼들에게 끊임없이 자신의 몸을 뜯어먹으라는 신호를 보낸 후 이런 살신(殺身)이 이뤄진다고 결론지었다.

예컨대 배 밑에 새끼를 놓고 이들을 톡톡 두드리는 방식으로 주의를 환기시켜 자신의 몸에 올라타게 하는 것도 신호의 하나라는 것. 비탈거미 어미는 이런 식으로 신호를 보낸 끝에 보통 일주일 안에 새끼들에 의해 완전 분해된다.

새끼들에게 먹히기 전 일부러 어미를 새끼들과 떼어놓으면 다른 곳에 가서 새끼를 까고 똑같은 살신 행동을 반복한다. 거미는 동족마저도 무차별적으로 잡아 먹을 만큼 포식성이 남다른 동물. 자손번식이 끝난 후에는 암놈이 수놈을 잡아먹는 일도 흔하고 어미가 새끼를 잡아먹거나 새끼들끼리 생사투쟁을 벌이는 일도 잦다.

김박사는 "비탈거미의 살신 행위는 종족보존을 위한 거미의 사회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 라고 설명했다. 거미의 사회성은 근래 알려진 사실. 3만4천 종에 달하는 거미 중 기껏해야 수십 종만이 사회성을 가진 것으로 밝혀져 있다.

따라서 개미나 벌과는 달리 연구도 상대적으로 미진한 형편. 사회성을 가진 거미는 수십 혹은 수천 마리씩 떼지어 사는 종들에게서 주로 발견된다.

그러나 '사회성' 이 있다 해도 개미.벌과는 달리 겉모양에 전혀 차이가 없다. 일벌. 일개미, 병정벌. 병정개미 등은 아예 운명적으로 나름의 역할을 부여받고 태어난다.

따라서 겉모습 뿐만 아니라 유전적으로도 차이가 뚜렷하다. 거미가 살신양육과 공동사냥에 나서는 행태는 사회성을 설명하기에 충분하다.

김박사는 "먹이를 칭칭 묶는 거미, 은신처를 마련하는 거미, 운반하는 거미가 따로 있다. 다만 이들의 역할이 항상 고정된 것은 아니다" 라고 말했다.

정보를 주고 받는 방식도 거미답다. 개미.벌이 주로 페로몬이라는 화학물질로 의사를 소통하는데 반해 거미는 거미줄을 툭툭 쳐서 신호를 보낸다. 톡톡. 토도독. 부르르 등 거미줄을 진동시키는 방법만도 수십가지가 넘는다.

사람들이 모르스 부호로 통신하는 것과 진배없다. 거미가 신호를 보내는 수단은 가슴팍 앞에 달린 촉지라는 다리처럼 생긴 기관으로 곤충의 더듬이 역할도 한다.

거미줄은 거미의 생활상이 집약된 곳. 살신 양육하는 거미의 경우 헌신을 준비하며 생애에 가장 튼튼한 집을 짓는다. 특히 사회성 거미의 경우 일부는 자신의 몸집에 30~40배가 넘는 귀뚜라미.딱정벌레도 공동으로 보조를 맞춰 공격한다.

거미줄 한가운데 먹이를 향해 수십 마리가 한발을 척 내딛고 쉬었다가 일시에 다시 한발을 척 내놓으며 일사불란하게 전진하는 모양새는 가히 사회성의 극치다.

거미줄은 작게는 동전만한 크기에서 크게는 수백 평에 이르는 것도 있다. 끈끈하고 큰 거미줄에 걸리면 생쥐도 빠져나가기 어렵다는 말이 과장이 아닐 정도. 그러나 거미는 개미.벌 만큼 철저히 사회생활을 하는 것 같지는 않다.

비탈거미는 어미를 잡아먹고 한달 후쯤이면 둥지를 떠난다. 일단 집을 떠나면 형제끼리 다시 만나도 서로 잡아 먹을 수 있다. 살신모성도 형제애를 지킬만큼 강하지는 못한가보다.

김창엽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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