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대기업 분사 줄잇는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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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5면

컴퓨터 건축설계 및 시뮬레이션 전문업체인 삼건베리클의 이태철 (李泰哲) 사장은 올 5월까지만 해도 삼성물산 건설부문 CIC (건설정보통합관리) 팀장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자신을 비롯한 12명의 팀원 전원이 퇴직금을 출자해 자본금 8천만원으로 만든 업체의 사장으로 변신했다.

사무실임대료는 삼성으로부터 무이자로 대출받아 마련했고 이미 사용하던 장비도 싼 값에 구입할 수 있었다.

오랫동안 한솥밥을 먹으며 다져진 조직력을 바탕으로 분사후 6개월 만에 패션전문 복합상가인 부산 르네시테의 통합운영시스템 개발용역 등 30여 프로젝트를 수주해 연말까지 매출 10억원 돌파를 예상하고 있다.

대기업 구조조정 열풍이 불면서 주변사업부문을 임직원들에게 맡겨 독립법인화하는 분사 (分社)가 활기를 띠고 있다.

모 (母) 기업 입장에서는 정리해고라는 극단적 방법을 쓰지 않고 몸집을 줄일 수 있고, 분사로서는 최소한의 '홀로 서기' 를 할 수 있는 물량과 지원이 확보되기 때문이다.

직원이 적게는 10명 미만인 곳에서부터 LG전자서비스 같이 2천명이나 되는 대기업도 있다.

독립한 기업은 모기업이 전액출자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대부분 자율경영이 보장되는 것으로 알려졌다.

삼성의 경우 올 들어 그룹에서 떨어져 나간 50여곳중 모기업이 20% 이상 출자한 곳은 삼성전자서비스 등 2곳뿐이라는 것.

◇ 활발한 분사 = 분사를 통한 몸집줄이기가 가장 활발한 곳은 삼성. 올 들어서만 전자.전관.화재.석유화학 등 10개 계열사에서 50개 회사가 독립해 6천여명의 직원이 자리를 옮겼다.

건물.공장 경비 및 관리, 청소용역, 식당, 차량운수 등 총무업무 분야가 주대상. 삼성전기.전관의 경우 부품제조분야를 독립시키기도 했다.

특히 삼성전관은 무려 24개의 분사를 탄생시켜 눈길을 끌고 있다.

LG도 LG산전이 주유기.세차기부문을 독립시켰는가 하면 차량정비기기 등과 LG전자의 애프터서비스.총무부문 등을 독립시켜 8개 분사에 2천3백여명이 이동했다.

현대는 현대전자 한 곳에서만 7개의 분사가 이뤄졌다.

10명으로 독립한 미래SI (영상.방송시스템)에서부터 2천3백명으로 독립한 칩팩코리아 (반도체조립) 까지 다양하다.

이밖에 대우도 대우전자에서 전자악기사업과 애프터서비스부문을 독립시키는 등 분사가 기업 구조조정의 한 방편으로 자리잡고 있다.

5대그룹뿐 아니라 동양물산 (동양메디칼시스템).효성 (동양인더스트리) 등 다른 기업들도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분사를 활용하고 있다.

◇ 어떤 효과가 있나 = 모기업 입장에서는 인력을 줄여 조직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게 최대 이점. 독립회사도 대기업의 관료체제에서 벗어나 저비용구조의 전문화로 경쟁력을 가질 수 있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격' 이다.

지난 7월 현대전자의 PC사업부에서 독립한 멀티캡은 한달 만에 PC가격을 20%나 내릴 수 있었다.

현대전자 사업부 시절 공통으로 부담했던 광고비.스포츠단 지원비 등을 덜 수 있고 인원도 기존의 절반인 94명으로 줄이면서 원가절감을 이룩한 것. 김정열 마케팅부장은 "얼마 안되는 직원으로 생산.영업.개발.관리 등을 해야 하는 만큼 업무량은 두 배로 늘었지만 전직원이 내 회사라는 자긍심을 갖고 열심히 일한다" 고 만족해 했다.

LG경제연구원은 최근 '기업구조조정과 MBO의 활용방안' 이라는 보고서를 통해 대기업이 분사를 통해 군살빼기를 하면 ▶핵심역량의 경영자원 집중 ▶재무구조 건실화 ▶수익성 및 기업가치 상승 ▶효율적 자산이용 등의 효과를 올릴 수 있다고 밝혔다.

◇ 문제점과 대책 = 분사한 경우 대부분 복지수준이 떨어지고 월급도 줄게 돼 사원들의 반발이 생길 수 있다는 것이 문제. 분사를 앞둔 A사의 경우 직원들이 보수가 30~40% 줄어들고 근로조건도 훨씬 열악해진다는 이유로 반발해 진통을 겪고 있다.

특히 분사직원들은 대부분 퇴직금을 출자해 참여하므로 자생력을 갖춰 살아남아야 하는 부담을 떠안게 된다.

분사되는 사업부는 실적이 안 좋거나 조직효율상 필요없는 분야도 적지 않아 자칫하면 경쟁력을 잃어 망할 수 있다는 우려도 만만치 않다.

삼성경제연구소 신현암 수석연구원은 "분사가 이뤄질 때 모기업에서 3~4년 정도 일감을 보장해 주는 경우가 많지만 여기에만 의존하면 자생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새로운 영역 개척이 필수적" 이라고 말했다.

한편 분사에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예를 들어 모기업이 분사된 기업에 자산을 싸게 팔거나 자금.영업 등을 지원해 주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공정거래법 위반 소지가 있는 것이다.

차진용.김종윤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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