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좌추적 늘었다…한 은행서만 10만계좌 뒤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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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 계좌추적, 늘어도 너무 는다 = 올들어 대형 시중은행 본점에 접수된 계좌정보 요구는 이미 지난 한해 수준을 적어도 30%, 많게는 두배 이상 웃돌고 있다.

조사대상 고객수는 은행 한곳에 줄잡아 수만명으로 추산된다.

자료요청 공문이나 영장에 통상 수십명에서 많으면 수천명까지 조사를 요청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A은행의 경우 이미 9만명을 넘어섰고 연말까지 10만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여러 은행에 중복요청한 부분을 감안해도 올들어 당국이 은행들을 통해 뒤진 계좌수는 수십만개에 달할 것으로 보인다.

특히 새 정부 들어 고위직 및 민원직이 대거 교체됨에 따라 공직자윤리위가 서울시의 경우만 해도 한번에 2천~3천명분, 지방 대도시는 수백명분의 자료를 한꺼번에 요청해 오는 경우가 잦아졌다.

이처럼 계좌추적이 급증하면서 은행마다 몸살을 앓고 있다.

주말인 지난달 31일 오전 B은행 본점에선 한 행원이 전화통에 대고 고성을 질러댔다.

며칠 전 수십명의 고객 계좌정보를 요구한 사법당국의 고압적 독촉전화에 참다 못해 화를 내고 만 것. 금융기관 실무자들은 계좌추적 요청이 급증한데다 절차를 무시한 당국의 고압적 태도에 속앓이까지 하고 있다.

계좌추적 업무가 폭주하면서 웬만한 은행은 본점에 전담직원을 하나씩 두기 시작했다.

은행들은 이들의 인건비는 물론이고, 계좌추적 사실을 고객에게 알리는 데 드는 등기우편요금까지도 고스란히 부담하고 있는 실정. B은행 관계자는 "아무리 공무수행이라고 하지만 일손이 바쁜 영리법인에다 방대한 자료를 요구하면서 마치 당연히 내놓을 것 내놓는다는 식으로 나오면 심한 모멸감을 느낀다" 고 털어놨다.

◇ 부작용도 문제다 = 적법한 절차나 목적에 의한 계좌추적은 불가피한 것이다.

문제는 계좌추적이 남용.오용될 가능성과 이에 따른 부작용이다.

은행관계자들에 따르면 ^대상자가 아닌 고객의 입출금전표도 함께 들어 있는 전표철을 통째로 달라고 한다든가^대상자의 특정기간 거래내역을 명시한 영장을 들고 와 예금자의 각종 인적사항이나 전산원장.전표 등 공문에 없는 내용까지 구두로 시시콜콜 요구하는 일 등이 적지 않다고 한다.

계좌추적이 악용될 수 있는 소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 정치적 목적의 계좌추적이 남용되는 것도 문제다.

이미 지난 정권에서 이같은 문제가 드러난 바 있다.

지난 2월말 검찰이 발표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의 비자금사건 조사결과에 따르면 97년 당시 배재욱 (裵在昱) 청와대비서관의 지휘아래 경찰청 조사과에 은행감독원 및 증권감독원 직원들까지 파견돼 金당선자의 친인척 41명의 계좌를 포함, 총 7백여개의 계좌를 뒤진 사실이 밝혀졌다.

정권이 바뀐 후 이번에는 한나라당이 지난 9월 24일 경찰청 조사과가 비슷한 방식으로 야당의원의 계좌를 추적하고 있다는 주장을 내놓았다.

숙명여대 신세돈 교수 (경제학) 는 "범죄나 부정부패를 뿌리뽑기 위한 계좌추적은 불가피하다" 고 전제, "다만 계좌추적이 남용되거나 정치적으로 이용될 경우 예금이탈은 물론 금융실명제 자체가 무력화될 수 있다는 점을 경계해야 한다" 고 말했다.

◇ 대책 = 전문가들은 무엇보다도 계좌추적권의 남용을 막아야 할 것으로 지적하고 있다.

국민대 송치영 교수 (경제학부) 는 "검찰의 계좌압수수색영장에 대한 법원심사를 강화해 추적대상 범위가 너무 넓거나 모호한 경우를 걸러내야 한다" 고 말했다.

이와 함께 은행부담을 줄여주기 위해 계좌추적을 요구하는 쪽에 필요한 경비를 부담시키는 방안도 거론되고 있다.

실제로 고객이 은행에서 잔고증명 한통을 떼더라도 1천원 안팎의 수수료를 내야 하는 점과 비교해도 계좌추적에 수수료를 매기는 방안이 도입돼야 한다는 것이 은행들의 주장이다.

중앙일보 기획취재팀 손병수.홍승일.채인택 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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