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점수 교육'의 탈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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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이번에 교육부가 확정 발표한 '2002학년도 대입제도 개선안' 은 비단 입시제도의 획기적 개선이라는 차원을 넘어 국가경쟁력 제고라는 국가적 목표의 실현의지를 담고 있다고 평가하고 싶다.

대입제도 개선은 국민 모두가 커다란 관심을 갖고 있었지만 지금까지 실마리를 찾기 어려웠던 것이 사실이다.

이번 개선안은 안정적으로 시행되고 정착되기만 한다면 단순한 제도개선을 넘어 진정하고도 근본적인 교육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 줄 것이다.

한마디로 기존제도는 '점수에 의한 한 줄 세우기' 였다.

즉 학생의 다양한 능력에 대한 평가가 완전히 배제된 채 오로지 학력만 측정하는 몇 가지 종류의 점수로 수험생을 한 줄로 세워 놓았다.

대학들은 그저 양파껍질을 벗겨 내는 정도의 미세한 우열분석작업만으로 학생능력을 선별했던 것이다.

그러한 점수분리작업의 성패에 따라 대학순위가 결정되고 그렇게 형성된 대학간 서열이 사회에서 공인됐다.

이런 평가에 급급한 대학은 자연히 학생의 창의력과 성장잠재력에 대한 평가는 도외시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대입풍토 아래서는 초등학교때부터 점수를 위한 교육 이외의 다른 교육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급기야 개성교육이 무시되는 학교생활에서 우리 자녀들이 겪어야 하는 무거운 심리적.육체적 짐에 대해 우리 모두는 일종의 죄의식마저 갖게 됐을 정도다.

학부모 입장에서는 막대한 사교육비 부담을 감수해야 했고 이는 가계를 넘어 국민경제의 정상적 순환에도 지장을 초래하기에 이르렀다.

심지어 기업의 인력선발에도 지원자의 대입수능 점수와 출신대학의 서열이 결정적으로 반영된다.

우리 학생들은 초등학교때부터 점수로 줄을 서기 시작해 점수로 대학에 들어가고,점수로 취직하고, 결국은 점수로 결혼해 아들 딸을 낳고, 그 자녀들을 또 다시 점수 교육시키기 위해 수입의 상당량을 투자해야 하는 것이다.

점수의 악순환은 한국 교육을 피폐하게 만들고 급기야 점수계급사회를 고착한다.

이제 때늦은 감은 있지만 다행히 이같은 고리를 결정적으로 끊을 수 있도록 무시험제도와 추천제를 골간으로 하는 입시제도 개선안이 마련됐다.

앞으로 남은 과제는 필연적으로 있을 수밖에 없는 새 제도의 단점을 최대한 보완해 이를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다.

대학은 2002년까지 남은 3년간을 추천제 대입제도 정착을 위한 준비기간으로 생각하고 이 제도의 세부적 시행지침을 마련하는데 만전을 기해야 할 것이다.

학교생활기록부와 수능 결과를 이용하는 방법, 추천서와 자기소개서를 평가하는 방법, 심층면접 활용방법 등의 개발에 관해 지속적이고도 심층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한다.

이제 대학간 경쟁은 과거와 달리 특성화.내실화에 의해 판가름날 것이기 때문에 학생선발 기준에 관한 발상의 전환이 이뤄져야 한다.

새 대입제도의 최대 수혜자는 물론 초.중등교육 자체일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 정당하게 따라오는 부담도 만만치 않고, 특히 고교 일선현장에서 담당해야 할 몫은 매우 크다.

입시의 부담에서 해방된 고교교육 정상화의 기반이 마련되기 위해서는 교육관행과 교육과정의 일대 혁신이 필요하다.

일선고교와 학부모측에서 새로운 제도의 취지와 방향에 대해 전폭적으로 지지하는 목소리가 나오면서도, 다른 한편으로 새로이 담당해야 할 부담에 대해서는 상당한 불편함이 표출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무엇보다 학생부의 철저하고도 공정한 관리와 추천서의 공정성을 위해 소요되는 시간적.심리적 부담이 결코 작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입시의 객관성과 투명성은 소수점 이하의 점수로 보장되는 것이 아니라, 대학간 특성화와 자율경쟁에 입각한 공정성에 의해 판가름날 것이다.

수험생과 학부모들도 객관성의 기준에 관해 인식의 전환을 이뤄야 한다.

이 모든 어려운 점에도 불구하고 교육관련 당사자들은 우리의 미래세대를 위해 새로운 제도가 무사히 자리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한국 대학의 국제경쟁력 취약, 학벌중심 사회의 폐단, 고교교육의 파행 및 막대한 사교육비 부담이라는 고질적 문제는 어떠한 대가를 치러서라도 꼭 해결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동안 학교당국뿐 아니라 학부모들까지도 싫든 좋든 점수로 한 줄 서기라는, 어찌 보면 대단히 간편한 방법에 순치되고 익숙해져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제 우리 모두에게는 익숙한 것과의 결별을 시도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이상일(서강대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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