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우덕의 13억 경제학] ‘님은 언제 오시나요(何日君再來)!’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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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가 즐겁게 보내고 계시지요? 베이징 한 군데 더 가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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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北京)서남쪽 스좌장(石家莊)가는 길에 루고우챠오(盧溝橋)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원(元)나라 시기 베이징을 찾은 마르코폴로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라고 한 바로 그 다리입니다. 용딩허(永定河)위에 걸려있습니다. 용딩허는 옛날 큰배가 들어올 정도로 큰 강이었답니다. 지금은 말라 물이 거의 없습니다. 그래도 루고우챠오는 아름답습니다.

루고우챠오는 발을 들여놓고 봐야 아름다움의 깊이가 더합니다. 다리 교각 위에는 사자들이 웅크리고 앉아 있습니다. 크기도, 모양도 각기 다릅니다. 흐르는 시냇물을 유심히 듣고 있는 듯한 사자, 엄마 품에 안긴 듯 따뜻한 얼굴을 가진 사자, 하늘의 구름을 응시하고 있는 사자,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사나운 얼굴을 가진 사자, 농담을 건네면 금방 달려들 듯한 사자…. 함께 간 아내와 저는 사자 한 마리 한 마리를 보면서 어떤 모습인지를 서로 얘기하느라 시간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곳 경비원에게 사자가 몇 마리냐고 슬쩍 물어봤더니 '한 5백마리 될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습니다. 모두 4백98마리라고 책에 쓰여있더군요. 이중 교각위에 앉아있는 사자는 2백81마리랍니다.

제가 베이징특파원으로 있던 2001년 10월 8일. 루고우챠오에 귀빈이 찾아옵니다. 고이즈미 당시 일본총리였습니다. 그는 다리 옆에 있는 '중국 항일전쟁 기념관'을 방문해 헌화했습니다. 그리고 입을 열었습니다.

"전쟁의 비참함을 새삼 절감했습니다. 침략으로 희생된 중국인들에 대한 사죄와 애도의 기분을 갖고있습니다. 인간은 과거를 공부함으로써 반성합니다. 일본은 두 번 다시 전쟁을 해서는 안 된다는 반성에서 전후 평화 국가로서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당시는 고이즈미 총리의 신사참배 문제, 교과서 왜곡 등으로 한-일 중-일간 매우 껄끄러울 때였습니다. 이런 때 왜 고이즈미는 루고우챠오를 방문했던 걸까요. '쇼를 하라, 쑈~'

1937년 7월 7일 밤.

이곳에서 10여 발의 총성이 들렸습니다. 누가 어디서 쏜 것인지 확실치 않습니다. 이 총성은 그러나 중국현대사에서 가장 끔찍했던 일로 기억될 사건의 신호탄이었습니다.

당시 일본 침략군은 다리 왼쪽에서 훈련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총소리가 들린 바로 그 시간 한 병사가 실종됐답니다. 일본군은 '중국 군대가 일본 사병을 사살했다'라는 핑계를 대고 오른쪽에 있던 중국군에 무차별 사격을 가했습니다.

여기가 끝이 아니었습니다. 일본은 중국에 대해 선전포고도 없이 전면공격을 가해왔습니다. 그렇게 중·일 전쟁이 시작된 겁니다. 당시 실종됐던 병사는 용변을 보러갔었고, 20분 후에 돌아왔다고 합니다. 일본은 고의적으로 루고우챠오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중국을 먹겠다고 달려든 겁니다.

전면전이었습니다. 당시 동북지방을 장악했던 일본군은 전쟁발발 1개월만에 베이징과 텐진(天津)을 손에 넣었습니다. 결국 그 해 일본군은 당시 국민당 정부 수도였던 난징(南京)까지 밀고 내려왔습니다. 밀리던 장개석정부는 결국 수도를 총칭(重慶)으로 옮겨야 했습니다. 12월 난징을 점령한 일본군은 2개월 간에 걸쳐 중국인을 무차별 학살합니다. 난징 대학살이지요. 30만여명이 죽었습니다.

공리 주연 영화 '붉은 수수밭(紅高粱)'을 보셨는지요. 중국을 하겠다는 사람은 꼭 봐야하는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 일본군의 잔악상이 나옵니다.

주인공(공리)이 시집 간 마을에 일본군이 쳐들어왔습니다. 일본군은 선량한 중국인을 괴롭힙니다. 일본군을 화내는 일(내용은 잊었지만)이 하나 발생했습니다. 일본군은 마을 주민들을 죽이기 시작합니다.

그때 일본군이 한 주민을 거꾸로 매달고, 다른 한 주민을 부릅니다. 다른 주민에게 명령이 떨어집니다.

'매달린 저 사람의 가죽을 벗겨라. 그렇지 않으면 너 죽는다'

그는 거부할 수 없었습니다. 죽느냐 사느냐의 기로에 서있었으니까요. 총구가 그의 등을 겨냥하고 있었습니다. 결국 그는 칼을 잡습니다. 매달린 이웃 주민의 가죽을 벗기기 시작한 겁니다. 그이 칼날이 이웃 주민의 이마를 헤짚고 들어갑니다.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집니다.

칼을 잡았던 그는 미쳤습니다. 이웃을 죽여야 했던 죄책감, 사람을 잡아야 했던 인간 백정이 된 자신을 부정하는 길은 미치는 것밖에 없었을 겁니다. 사람을 만나면 히죽이죽 웃던 그 연기자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일본군은 그렇게 중국을 유린해 들어갔습니다.

1945년 패망하기 전까지 일본군의 중국 침탈은 차마 눈뜨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참혹했습니다. 루고우챠오 앞에 있는 항일기념관과 난징에 있는 대학살 기념관이 이를 보여줍니다. 창장(長江)강물에 버려진 시신, 중국인을 꿇어앉혀 놓고 칼을 휘두르는 일본군인, 생매장 현장, 중국인들의 머리를 벤 뒤 머리통을 잡고 즐거워하고 있는 일본군….

일본의 승리는 눈앞에 둔 것처럼 보였습니다. 수 개월이면 중국을 먹을 수 있다는 당초 계산이 먹혀 들어가는 듯 했습니다. 그러나 난징이 끝이었습니다. 중국인들의 저항이 갈수록 거세지면서 일본군은 수렁에 빠지기 시작했습니다. 장개석이 전쟁을 이끌었지요. 그 와중에 서안사변이 발생했고, 서로 싸우던 국민당과 공산당은 제2차 국·공 합작을 이뤄내 공동의 적 일본과 전쟁을 했지요. 1945년 일본이 패망하고, 다시 국공 내전이 시작되고, 공산당이 승리하고,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탄생하게 됩니다.

루고우챠오에서 돌아오는 길.

라디오에서 '허르쥔짜이라이(何日君再來)'라는 노래가 흘러나옵니다. 중국인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대만 가수 덩리쥔(鄧麗君)이 부른 노래입니다. 이 노래 역시 항일운동과 관련이 있습니다.

당시 중국에 '何日君再來'라는 연애 영화가 유행하고 있었답니다. 그 영화 주재 곡은 순식간에 중국 전역으로 번져갔습니다. 중국인들은 음악 속의 '君'을 항일전쟁을 지휘한 장개석으로 비춰졌다는군요. 장개석은 당시 많은 중국인들의 영웅이었습니다. 그가 언젠가는 일본군을 몰아내고, 다시 올 것이라는 기대감을 담았던 겁니다. 중국인들은 그 날이 오기를 염원하며 그 노래를 불렀습니다.

마이크가 있으면 한 자락 뽑아드리고 싶지만, 아쉬우나마 가사로 대신합니다.

'好花不常開(아름다운 꽃은 시들게 마련입니다)
好景不常在(아름다운 경관도 곧 싫증나게 되지요)

今宵離別後(오늘 밤 이별한 뒤에)
何日君再來(당신은 언제 다시 오시나요)

人生難得幾回醉(인생 살면서 몇 번이나 취해보겠습니까)
不歡更何待(기쁘지 않고서야 어떻게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來來來(가까이 오세요)
喝完了這杯再說(이 잔 드시고 다시 말씀해 주세요)

今宵離別後(오늘 밤 이별한 뒤에)
何日君再來(당신은 언제 다시 오시나요)'

덩리쥔을 만나고 싶은 분은 여기를 클릭하십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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