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8년8월 그리고 50년]8·15와 제2 건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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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5면

'역사적 하루' 는 대체로 '하나의 강력한 의미' 를 지닌다.

그러나 8.15는 다른 역사적 하루와는 다르다.

의미가 더없이 강력하지만 단순하지 않다.

하나가 아니다.

광복과 정부수립이라는 '기념적 의미' 뒤편에 분단과 대립의 '아픔' 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이다.

1945년 8.15광복은 흔히 '한밤중의 신랑처럼' 갑자기 찾아왔다고 하지만 일제의 폭압에 가위 눌린 대중들은 그날 쥐죽은 듯 고요하기만 했다.

'삼각산이 일어나 더덩실 춤추고, 한강물이 뒤집혀 용솟음칠' 광복의 환희는 그 다음날인 16일의 일이었다.

광복으로 대중들은 '어련무던한 유토피아' 를 꿈꾸고 있었다.

하지만 한반도는 늘 외세가 종횡하는 곳. 그래서 해방의 환희보다는 분할점령이 몰고 올 앞날에 대한 준비가 더 필요한 시기였다.

안재홍 (安在鴻) 이 "해방은 16일 하루뿐" 이었다고 말한 것은 그런 아쉬움의 토로일 것이다.

1948년 8월 15일, 광복 3년의 파란과 곡절 끝에 마침내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됐다.

태극기와 유엔기가 드리워진 중앙청 광장에서는 통위부 (統衛部) 군악대의 반주 속에 이승만 대통령의 기념사를 중심으로 장대한 의식이 진행됐다.

덕수궁에서는 자유종 (自由鐘) 이 울려퍼지고 축하담배 '계명 (鷄鳴)' 이 시판되기도 했다.

그러나 그해 8월의 현실은 정부수립만 추억할 만큼 단순하진 않았다.

사상 유례없는 수해로 막대한 피해가 있었다.

7월에 이미 기상관측 신기록이 나오더니 불과 한달 후엔 그마저 깨지고 말았다.

피해는 경상.전라.충청 등 남한 전역을 휩쓸었고 수천명의 사상자와 수십만명의 이재민이 생겨났다.

그런 재난이 역사가의 기억에서조차 흐릿하게 된 것은 아마도 그땐 '더 역사적인' 사건이 많았기 때문일 것이다.

정부수립에도 불구하고 엄연히 남아 있는 과제는 민족분단이었다.

8월초 북한에선 최고인민회의 입후보자 등록이 있었고 그후 남한 전역에서는 이들을 뽑기 위한 비밀 '지하선거' 와 참여자들에 대한 검거선풍이 휘몰아쳤다.

그것은 마치 다가올 전쟁의 예진 (豫震) 과도 같은 것이었다.

지나간 홍수나 태풍보다 다가올 분단과 전쟁에 대한 대비가 더 시급한 때였지만 권력투쟁은 지루한 장마처럼 이어졌다.

이윤영이 총리로 지명됐으나 국회에서 부결됐고 이시영 부통령은 조각에 불만, 수원으로 내려갔고 정부수립에 적극 참여했던 한국민주당마저 야당으로 돌아섰다.

한편 남북연석회의에 참여했던 김구.김규식은 '분단하의 불완전한 독립정부는 전쟁으로 이어진다' 는 문제의식으로 통일독립촉진회를 결성, 평화통일운동에 매진하겠다고 결의했다.

이후로 8.15에는 광복과 정부수립에 대한 기념뿐 아니라 그것이 남긴 과제, 즉 분단극복과 통일에 대한 제안들이 발표되곤 했다.

60년 김일성의 '과도적 조치로서의 남북연방제' 제안, 박정희 대통령의 유엔 동시가입 촉구 등 각종 제의, 전두환 정권의 남북한 경제협력 제의, 노태우 정부의 남북 정상회담 제의, 김영삼 정권의 '민족공동체 통일방안' 등도 모두 8.15의 산물이었다.

8.15의 분단 처방전은 비단 정부 당국자들만의 일은 아니었다.

72년 김수환 추기경이 남북 지도자들의 전쟁포기와 대화를 촉구했고, 김대중 대통령도 87년 통일민주당 고문 시절 '공화국 연방제' 를, 94년엔 악화일로의 남북관계 개선을 위해 미국 중재에 의한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80년대 후반부터는 학생 등 민간의 통일운동도 8.15를 중심으로 전개됐다.

89년에는 임수경양과 문규현 신부가 방북, 판문점을 통해 귀환했고 90년부터는 '범민족대회' 문제로 정부와 충돌하고 있다.

올해는 기묘하게도 정부가 수립되던 48년과 비슷하게 엄청난 수해속에서 8.15를 맞이하게 됐다.

수해 때문에 행사규모를 줄이는 것은 타당하지만 '제2의 건국' 을 위한 민족사적 과제는 오히려 강조돼야 할 것이다.

특히 올해는 북한에서 '통일대축전' 을 제안했고 우리 정부에서는 '민족화해협력국민협의회 (민화협)' 를 조직하고 있다.

정부가 정당.사회단체 등 각계의 견해를 폭넓게 수렴, 분열을 극복하고 남북간 교류.협력을 넓혀 통일의 가교를 건설하는 것이 바로 제2의 건국으로 가는 길일 것이다.

도진순 교수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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