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한국경제 청사진 내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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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개인이나 어느 조직사회를 막론하고 꿈이 없으면 생기 (生氣)가 없고 시들게 마련이다.

우리 인간도 청.장년 시절까지는 대체로 자기 인생의 꿈을 설계하고 그것을 실현하려고 노력하다 중.노년기가 되면 자기 가족, 사회와 인류에 대한 꿈을 갖게 되고 이 꿈이 성취될 수 있도록 처신하게 된다.

꿈이 없는 국가는 쇠퇴 국가나 민족도 마찬가지다.

나라에 비전과 꿈이 없으면 국가는 쇠퇴하고 국민은 실의 (失意)에 빠지게 된다.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경제위기의 최대피해는 국내총생산 (GDP) 격감과 가계수입 감소로 나타나는 금전적 손실보다 우리 국민들이 갑자기 자신감을 잃고 허탈과 절망감 속에서 앞날의 꿈을 잃고 방황하게 됐다는 사실이다.

우리 사회가 요즘 박정희 (朴正熙) 전대통령에 대한 향수에 젖는 이유중 하나는 60년대 우리가 비록 보릿고개의 배고픔을 맛보고 헌 고무신짝을 땜질해 신고 다니는 가난속에 지냈을망정 '잘살아보세' 라는 국민적 소망에 모두 동참해 지칠 줄 모르고 밤낮 없이 뛰었던 그 땀과 눈물에 대한 향수 때문이라고 본다.

그러나 불행히도 오늘날 우리 국민들은 60~70년대의 그 열정과 순수성이 사라져버리고, 그 대신 절망과 분노, 부정.부패와 집단이기주의가 만연한 사회에 살고 있다.

국제통화기금 (IMF) 한파로 온 국민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반면, 서울의 일류호텔들은 몰려든 외국손님들로 때아닌 호황을 누리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의 경제위기로 덕본 사람들은 갑자기 한국 일거리가 많아진 외국의 금융브로커, 국제변호사, 컨설턴트, 워크아웃 (기업개선작업) 전문가, 국제회계사, IMF.세계은행 등 국제금융기관의 직원들인 것 같다.

해외채무연장과 국채발행.외자유치 등에 관여한 수수료로 미국 월가의 금융기관들이 수천억원씩 떼돈을 벌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이다.

지난 1월말 우리나라 민간은행들이 지고 있던 2백50억달러 단기채무를 1~3년으로 연장해주면서 선진국 채권은행들은 단돈 1달러도 자신들은 손해보지 않고, 오히려 원래 빌려줬던 금리보다 훨씬 높은 평균 리보 (LIBOR) +2.5%의 마진에다 금상첨화로 우리 정부보증까지 받아냈다.

85년 멕시코정부가 진 빚을 만기연장협상할 때는 선진국 채권은행들이 연장기간을 14년까지나 허락하고 이자도 원래조건보다 훨씬 낮은 평균 리보+1%로 합의하는 등 자신들도 큰 손해를 감수했다.

돈을 빌려준 채권은행으로서의 대출실수에 대한 책임을 자기들도 져야 한다는 당연한 논리의 적용이었다.

外銀에 당하고 훈장까지 그러나 우리는 정부빚도 아닌 민간은행채무에 정부가 보증까지 서주고 마진도 올려주는 수모를 당했음에도 우리 정부는 오히려 협상이 잘 됐다고 자화자찬하며 우리측이 고용한 미국인 변호사에게 고맙다고 훈장까지 수여하는 희극을 연출했다.

이런 실수는 소위 채무지불정지 (Debt Moratorium) 하면 큰 일 날 것이라고 엄포를 쳐서, 국제금융의 역사와 관행에 대한 지식이 태부족한 김영삼 (金泳三) 말기정부를 위압한 서방 채권은행단과 그들을 측면지원한 미국 재무부 및 IMF의 술수에 넘어갔기 때문이었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민간은행들끼리 자의로 빌리고 빌려줬던 채무를 정부빚도 아닌데 국가 모라토리엄 운운할 하등의 이유도 책임도 우리에게 없었다는 것을 시장경제의 도사들인 선진국 채권은행들이 더 잘 알고 있었음은 물론이다.

경제는 파탄하고 서민들의 불안감은 갈수록 높아져 가는 국가적 대란 (大亂) 속에서 해외금융가와 브로커들만 제 세월 만나고 있으니 국민들의 심정은 오죽할까. 이럴 때일수록 정부는 우리 경제의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국민들을 분발시켜야 한다.

강도 높은 개혁과 뼈아픈 구조조정에 수반되는 오늘날의 희생이 미래의 한국경제에 어떠한 형태로 작용할 것인가를 명확하고 과학적인 청사진으로 설명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청사진은 우리 경제의 단순한 미래예측이 아니라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당당히 싸워 이길 수 있는 현대화되고 경쟁력 있는 기업.금융.행정의 선진화를 추구하는 우리 경제의 새로운 이정표 (里程標) 여야 한다.

우리의 비교우위를 최대한 활용해 21세기에 '동아시아의 싱가포르' 를 구축할 수 있는 우리 경제의 청사진이 나올 때 국민들은 오늘의 고난을 극복하고 내일의 영광을 향해 매진할 수 있을 것이다.

박윤식(미 조지워싱턴대 교수.국제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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