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주일의 영화사]4.그레타 가르보 뉴욕에 도착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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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그녀는 고통의 아름다운 화신이다. 그것은 고독의 고통이다.

생각에 깊이 잠긴 그녀의 얼굴은 저 먼 데서 다가오는 듯하다.' 그레타 가르보 (1905~1991) .무성영화와 유성영화 시기에 걸쳐 24편의 영화에 출연하고 36세에 전격 은퇴를 선언한 뒤 생을 마감할 때까지 세간의 시선으로부터 몸을 숨겨버린 희대의 여배우.

스웨덴 출신의 그녀가 MGM사 초청으로 뉴욕항에 도착한 건 1925년 7월6일. 그러나 MGM에서는 아무도 코빼기조차 비치지 않았다.

하루 이틀이 지나도 이렇다 할 소식이 없었다. 가르보는 애가 타긴 했지만 그다지 불안하진 않았다.

자기 옆엔 든든한 후원자인 모리츠 스틸러 감독 (1882~1928) 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가 미국 땅을 밟을 수 있었던 건 스틸러의 덕이었다.

바로 전해에 스틸러가 감독하고 가르보가 주연한 '괴스타 베를링의 이야기' 를 베를린에서 본 MGM의 간부는 스틸러에게 같이 일하자고 제안했다.

스틸러의 조건은 단 한가지. '그레타 가르보도 함께 데려가야 한다' 였다.

뉴욕에서 세 달 가까이 지나도록 할리우드에서는 '기다려보라' 는 응답 밖에 없었다. 같은 스웨덴 출신으로 먼저 할리우드에 건너온 시에스트롬 감독이 스틸러를 찾아와 위로했다.

"상대의 기를 제압하자는 저들의 술수니까 기다려 봐. 아무리 배짱 좋은 감독이라도 두어달 이렇게 지내다보면 저쪽에서 무슨 요구를 하든 머리를 숙이게 되거든" .

지리한 기다림 끝에 두 사람은 할리우드에 도착했다. 그런데 가르보를 만나 본 MGM 간부들은 스틸러 보다는 그녀의 상품 가치에 눈을 번쩍 떴다.

그녀는 곧바로 '격류' 라는 영화에 출연해 단박에 인기를 모았다.

반면 스틸러는 일감이 없어 놀고 있었다. 마음이 편치 않았던 가르보는 회사측에 스틸러의 영화에 출연하게 해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스틸러는 '유혹녀' 를 감독하게 된다.

그러나 영화의 형식미를 중시하는 그의 스타일은 할리우드에서 통하지 않았다.

간부들은 시시콜콜 제동을 걸어왔다. 결국 중도에 메가폰을 놓아야 했다.

가르보가 하루가 다르게 인기 가도를 급속히 달리는 사이 그는 패배감에 젖어 술잔만 기울였다.

몸까지 망친 스틸러는 마침내 스웨덴으로 돌아가 28년 11월8일 쓸쓸하게 세상을 하직했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가르보의 사진을 가슴 속에 꼭 품고 있었다.

뒷날 자서전에서 가르보는, 당시엔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지만 자신들은 스웨덴에서부터 연인 사이였다고 털어놨다. '평생 내가 사랑했던 유일한 남성이었다' .

가르보에게 따라다니는 '고통의 아름다운 화신' 이라는 수식어 뒤에는, 이처럼 스무세살 연상의 촉망받던 감독이었던 스틸러와의 비련 (悲戀) 의 사연이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영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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