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짝짓기]퇴출선정 경과·의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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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퇴출대상 은행이 난산 (難産)끝에 확정됐다.경영을 잘못해 부실화된 은행은 설립배경이 어떻든, 주주가 누구든, 망할 수 있다는 선례가 처음으로 세워진 것이다.

충분히 예고돼온 일이지만 최종 결정을 내리는 데는 여러 곡절을 거쳤다.동화은행은 실향민의 은행이라는 점이 걸려 경계선상에서 오락가락했다.

막판에 조건부로 살아날 듯도 했으나 '정치적으로 봐준다' 는 비판을 의식해 원칙대로 퇴출판정이 내려졌다. 동남은행은 경남은행과의 합병추진이 감안될 듯도 했으나 합병이 좌절되자 일찌감치 퇴출대상에 올랐다.

대동은행도 지역 중소기업 전담은행으로 육성해 달라는 지역인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살부 (殺簿)' 에 들게 됐다.

이밖에 경기은행은 수도권지역 국회의원을, 충청은행은 자민련을 동원해 각각 구명운동을 집요하게 벌여 명단확정이 더뎌지기도 했다.

특히 충청은행의 경우 정치적 역학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평가위원들이 마지막 순간까지 결정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퇴출 선정작업에 여러 잡음이 끼여들면 구조조정의 효력이 반감할 소지도 있다.

객관적인 외국투자자들은 "왜 5개냐" 는 의문을 품을 수도 있다.

5개 은행의 퇴출이 은행 구조조정의 완성판이라고 주장하기에는 어렵다는 지적이다.

금융감독위원회는 12개 부실은행에 대한 실사를 시작하면서 "일부는 청산할 수도 있다" 고 했다.

그러다 슬슬 현실과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청산은 어느새 물 건너 갔고 자산.부채인수 (P&A)가 유일한 방법으로 등장했다.

또 국제결제은행 (BIS) 자기자본비율 규제도 슬그머니 완화해 이중적인 잣대를 적용, 지방은행과 평화은행에 의도적으로 회생의 길을 터주기도 했다.

이 때문에 금융계에서는 '수술 후유증' 이 분명히 나타날 것이라고 걱정하고 있다.수술부위의 단순한 '통증' 차원이 아니라 병의 재발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금감위는 이에 대해 부실기업 퇴출 때처럼 추가 구조조정을 예고하고 있다.

부실은행의 상시 퇴출을 뜻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부실을 완전히 청소하고 우량은행만으로 금융시스템을 회복하자는 당초 취지와 크게 다른 것이다.

이 때문에 대외신인도 회복이 늦어지고 외국투자자들이 실망할 수도 있다.자칫하면 구조조정에 들인 희생이 무위로 그칠 우려도 있다는 얘기다.

한편 부실은행을 인수하는 우량은행들도 저항이 심해 앞으로 인수절차도 순탄치만은 않을 듯하다.

처음에는 우량자산만 인수받는 P&A방식이든, 법인을 통째로 넘겨받는 인수.합병 (M&A) 이든, 부실은행과 살을 섞는데 강하게 반발했다.

그러나 금감위가 부실은행을 떠안으라는 사실상의 명령을 내리자 따르지 않을 수 없게 됐다.

막바지에는 서로 괜찮은 은행을 잡기 위한 로비전이 벌어졌다.이왕 인수할 바에야 한번에 덩치를 크게 키우고 부실을 가급적 덜 떠안는 쪽으로 줄을 서자는 계산이었다.

은행장이 개인적으로 이헌재 (李憲宰) 금감위원장에게 부탁하거나 외국인 주주를 사이에 넣어 금감위에 로비를 벌이기도 했다. 이에 따라 짝짓기가 지난 주말 윤곽이 잡힌 원안 (原案) 과는 상당히 달라지게 됐다.

특히 한미은행의 경우 충청은행을 가져가는 것으로 알려졌으나 점포수가 70개나 더 많은 경기은행을 삼키는 '행운' 을 잡았다.

원래 경기은행은 1년전 신한은행과 합병설이 돌아 이번에도 신한은행으로 넘어가는 것으로 알려져왔다.

국민.주택은 서로 동남은행을 가져가려 했으나 금감위의 교통정리로 주택이 동남을, 국민이 대동을 인수하게 됐다.

이같은 은행간 알력이 완전히 해소되지는 않아 앞으로 인수과정에서도 말썽의 소지가 있을 수 있다. 일부 은행의 경우 주주들이 "부실이 깊은 은행을 금감위가 일방적으로 떠안으라고 하는 것은 초법적 행위" 라며 조직적인 반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또 29일부터 퇴출은행을 접수하는데도 인수주체 은행들은 이사회 결의도 하지 못하고 있다. 당연히 맺어야 할 퇴출은행과의 인수가계약은 엄두도 못내고 있다.

은행들은 절차와 형식도 갖추지 못한 채 금감위의 '전격작전' 에 동원돼 일단 행동에 들어갈 수밖에 없는 입장이다.

남윤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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