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악화가 양화를 내쫓는 선거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7면

나름대로 지방행정가로서 자질을 갖춘 40대 초반의 기초단체장 후보를 최근 만났다. 그와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안타까운 '고백' 을 들었다. 선거초반 그는 젊은 정치신인답게 의욕적으로 교통.환경 공약을 개발했다고 한다.

전문가를 찾아다니며 조언을 받았고 짧은 기간에 지역구의 현안을 숙지하기 위해 밤을 꼬박 지새운 날도 많았다는 것이다. 지역감정을 자극하기보다 정책을 제시하는 전략을 썼다고 했다.

하지만 그는 선거 막판으로 가면서 경쟁후보들의 '정반대' 선거운동에 밀려 "당선은 고사하고 사실 2등도 어렵게 됐다" 고 털어놓았다. 그를 제외한 다른 후보들이 앞다퉈 포르노 영화감독처럼 유권자들의 '말초신경' 을 교묘히 자극해 표를 긁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말을 요약하면 경쟁후보들의 선거전략은 그리 복잡하지 않았다. 앞뒤 재지 않고 '실업자 없는 지역사회 건설' 등 '폼' 나는 공약들을 내세운다는 것이다. 향우회.사랑방좌담회 등을 명목으로 입심 센 동네 아주머니들을 끌어 모아 은밀한 회식자리를 주선한다. 또 술집.음식점에 운동원을 보내 다른 후보의 사생활이 지저분한 것처럼 소문을 퍼뜨린다. 자신의 출신지역을 강조하며 "고향사람에게 표를…" 등의 구호를 '무뇌아 (無腦兒)' 처럼 되뇐다는 것이다.

그는 경쟁자들의 작전이 워낙 유치해 처음에 승리를 자신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이런 구태가 먹혀들고 있음을 깨닫게 됐다고 한다. 그는 "선거판에 돈과 비방, 지역감정이 난무하면서 점잖은 후보들은 아예 유권자들의 뇌리에서 사라지는 것 같다" 고 말했다.

그의 고백을 들으면서 이번 선거에서 어떻게 후보를 선택할지 생각해 봤다. 물론 실력.자질.청렴 등을 고려해 최상의 후보를 뽑아야 함은 불문가지 (不問可知) 다. 정책대결이 실종되고 비방.타락이 판쳐 선뜻 좋은 후보를 고르기 어려운 이번 선거판에선 안될 사람부터 지워나가는 '네거티브' 선택법도 좋을 듯하다. 이런 이유 때문인지 각 사회단체는 '뽑아선 안될 후보' 를 내놓았다.

실속없는 공약을 남발하는 정책부실형, 돈으로 표를 사려는 매수형, 남의 뒤통수나 치는 비방형, 지역감정을 조장하는 망국형 등. 투표날은 밝았다.

구름이 잔뜩 낀 다소 음산한 날씨라할지라도 투표장에 꼭 가자. 그리고 이런 유형은 피해서 찍자. 그러면 선거 뒤 적어도 바다에 '엄지손가락이 둥둥 떠다니는 후회' 는 하지 않을 것이다.

이규연 전국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