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역사- 그 고통을 넘어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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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새로운 한.일 (韓日)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박정수 (朴定洙) 외교통상부장관이 일본을 방문중이다.우연히도 극동국제군사재판의 '진실' 을 밝힌다는 영화 '프라이드 - 운명의 순간' 이 오늘부터 일본 전국에서 상영되고 있다. 아키히토 (明仁) 일왕이 영국 등 유럽 3개국 순방길에 나서는 것도 오늘이다.

이번 주말 일본에서 보게 된 이 3개의 서로 다른 행사는 과거 역사문제를 두통거리로 끌어안고 있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한국 외교통상부장관은 일본의 정.관계 고위인사들과의 회담에서 과거사문제에 관해 공식적으로 거론하지 않는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그는 오는 10월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방일 (訪日) 을 앞두고 '역사 청산' 을 위한 일본의 사과수준을 어떻게 주문하고 응답을 받아낼 것인지를 곰곰 생각할 것이다.

일본의 우파진영이 제작한 영화 '프라이드' 에서 보듯이 2차세계대전은 아시아의 식민지 해방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라든가, 일본은 악 (惡) 이 아니라는 주장이 커지고 있다. 이를 지원하는 세력들이 극히 일부라 하더라도 그들이 갖는 영향력은 정.재계에까지 폭넓게 뻗어있다.

며칠전 영국의 고급지 인디펜던스는 2차대전 당시 일본이 영국 포로들을 잔인하게 다루었다는 이유로 이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요구하며 일왕의 사진을 다른 흉악범 얼굴 사이에 끼워넣어 보도했다. 이에 대해 영국 정부에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한 주영 (駐英) 일본대사를 파면하라는 강경론이 우파세력에서 쏟아져 나오고 있다.

이들의 동정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나라가 중국이다. 주일 중국외교관들은 최근 도쿄 (東京)에서 있었던 '프라이드' 의 시사회까지 참석했다. 베이징 (北京) 의 외교부 당국자나 인민일보가 즉각적으로 대일 (對日) 비판을 강화한 점에서 한국과는 대조적이다.

한국의 신정부는 일본에 현실적인 접근을 모색하고 있다. 金대통령은 취임하면서 대일 문화개방과 일왕의 방한 추진, 수입다변화 정책의 철폐를 약속했다. 목의 가시처럼 여겨진 종군위안부 문제도 정부손으로 해결책을 강구함으로써 일본에 어깨를 펼 수 있게 됐다.

신정부는 국제통화기금 (IMF) 관리체제로부터 빨리 벗어나기 위해 일본의 적극적인 협력을 필요로 하고 있다. 신어업협정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일본의 '양보' 도 불가결하다. 그러나 이같은 구체적이고도 실질적인 문제들은 '역사청산' 에 대한 양국의 이해와 기대수준에 따라 빛을 내거나 가리워질 운명이다.

한 나라의 경제가 악화될수록 내셔널리즘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거품 경기가 꺼지고 실업자가 3백만명에 육박하고 있는 일본의 우경화 현상은 한국 등 이웃나라들의 관심사항이다. 이 시기에 과거사를 둘러싼 양국간 내셔널리즘의 대립이 어떤 사태를 불러일으킬지 너무나 분명하다. 한.일 두나라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에 기대와 우려가 교차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지금까지 일왕이 미국이나 중국 등의 최고 책임자와 만났을 때 언급한 역사문제는 "한때 불행한 일이 있었으며 가슴아픈 일이었다" 는 정도다. 한국에 대해서는 "통석 (痛惜) 의 염 (念) 을 금할 수 없다" 고 표현됐다. 이번 영국 방문기간에도 일왕의 발언은 비슷한 수준에 머물 것이다. 독일의 최고수반이 이웃나라 피해국에 표시한 사죄발언이나 행동을 일본에 기대하기 어렵다. 일본은 독일과의 이질론 (異質論) 을 내세우고 있다.

역사문제도 국력의 지배를 받는 것이 현실이다.일본과의 경제협력을 강화하기 위해 지난 1월 도쿄를 방문한 토니 블레어 영국총리는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총리로부터 과거사에 대한 사죄내용의 기고문을 받아냄으로써 영국내 대일 비판세력을 비켜나갔다. 金대통령은 지나치게 감정적인 반일 세력과 여론을 설득시킬 카드와 지도력을 지금부터 비축할 필요가 있다. 어쩌면 같은 시기에 도쿄를 방문하게 될 장쩌민 (江澤民) 중국 주석의 역사인식 및 카드와 비교될 것이다.

최철주 〈일본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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