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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 스토리] 지그시 눈을 감고 독서 삼매에 빠지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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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오북? 가끔 들어본 말이지만 대체 어떤 거야’하고 그 실체를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말 그대로 듣는 책이란 거다. 애초에 말을 배울 때도 소리부터 익혀 글을 배웠으니 가장 쉬운 게 소리인 셈이고, 종이책이 종이를 벗어나 음반으로 자리를 옮겨 소리로 돌아간 ‘복고적 환원’이 되는 셈이다.

달빛 내려앉는 소리도 사그락 들릴 것만 같은 고즈넉한 밤, 어둠이 가시도록 나직이 글 읽는 소리에 간간이 추임새처럼 문풍지는 떨리고, 일렁이는 호롱불에 꿈을 굽는 선비….

책을 읽는 사람의 이미지를 연상하면 늘 섬 같은 느낌이 든다. 읽는다는 행위가 책이라는 정지된 공간 속에서 오직 활자 위로 시선을 쏟아야 하고, 다소 엄격해 보이는 고립 속에서만 활자화된 ‘말씀’의 의미를 새겨들을 수 있기에 어찌보면 지적 호기심이 강한 사람일수록 고독한 그 작업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리라.

파피루스와 종이의 발견, 그리고 문자와 인쇄술의 발견은 지식과 지혜를 기록으로 남기게 함으로써 후대의 역사와 문화, 문명의 발전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그 기록을 위해 밤잠을 설친 선조들의 고뇌도 만만찮았을테지만 우리 역시 선조들이 전하고자 했던 내용을 알기 위해 다시 정지된 시공간에 갇혔다 풀려나곤 하는 행동을 반복하는 번거로움을 겪고 있다. 그 때문에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늘 두꺼운 렌즈의 안경을 낄 것 같고 범접하기 힘든 이미지로 형상화돼 버린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더욱이 전 세계적으로 그물이 쳐진 인터넷 덕택에 정보 공유시대, 문화 홍수시대, 작업 스피드시대 등으로 인식될 만큼 자본과 개인 욕구를 향한 물리적 시간이 세분화되고 정치 문화적 변화의 흐름이 빠른 시대, 놀거리와 볼거리, 들을거리가 넘쳐나는 이 시대에 자칫 책을 즐겨 읽는 사람이나 만드는 사람 혹은 작가는 곰팡내 나는 인종으로 분류돼 속칭 ‘왕따’신세가 되는 건 아닐까? 세대를 걸머지고 나갈 어린이에게도 “너 책 읽을래, 아님 컴퓨터게임 할래?”하고 물으면 십중팔구가 아니라 십중십이 컴퓨터 앞에 앉길 희망할 정도니 말이다.

생각해 보면 책 속의 글이란 본디 음성으로 전달되고 소통되는 말을 다시 기호화한 것이니 ‘읽는다’는 것은 글을 다시 음성으로 전환하는 작업일 수도 있을 터. 그러니까 간접적인 음성을 듣는 것인데 책을 읽는 동안 고립으로부터 자유로워질 방법은 없을까? 책을 읽으면서도 다른 일을 하고 다른 이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일거양득일 텐데 말이다.

매체환경의 변화와 도구의 발전, 그리고 디지털시대에 걸맞은 탈(脫)아날로그의 독서.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는 말처럼 말 혹은 소리가 갖는 장점은 다수를 상대로 즉흥적 전달력이 강한 반면, 보존할 장치가 마련되지 않는 한 제대로 남겨둘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반면 글이 갖는 장점은 기록으로 남겨두긴 쉬우나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전달되기가 어렵다는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이 두 가지의 장단점을 절충할 묘안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서당개’에게서 찾을 수 있었다.

풍월을 읊는 서당개는 오랜 시간 소리를 반복해 들음으로써 태어날 수 있는 매력적인 존재가 아닌가! 끊임없이 말하지 않아도 계속 들을 수 있는 것, 영리한 인간들은 오디오 장치를 이미 만들어 두었으니 소리를 문자가 아닌 소리 그 자체로 보존하는 것에 고대와 같은 어려움이 없다. 그리하여 이른바 ‘오디오북’이 생겨나게 되었다.

‘오디오북? 가끔 들어본 말이지만 대체 어떤 거야’하고 그 실체를 궁금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을지 모른다. 단순하게 생각하자. 말 그대로 듣는 책이란 거다. 애초에 말을 배울 때도 소리부터 익혀 글을 배웠으니 가장 쉬운 게 소리인 셈이고, 종이책이 종이를 벗어나 음반으로 자리를 옮겨 소리로 돌아간 ‘복고적 환원’이 되는 셈이다. 다른 것이 있다면 도구를 이용했다는 것이랄까.

말 자체는 생경할지 모르지만 이미 우리 주변엔 오디오북이 널려 있다. 글도 모르는 어린아이가 성우가 낭송하는 동화테이프를 들으며 책장을 넘기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다. 그러곤 자신이 들은 동화내용을 이야기한다. 더 앞서 벌써 20여년 전부터 쓰던 외국어회화 교재도 오디오북의 한 모습이다. 다만 그것들이 영역의 한계성을 가졌으며 일정 대상에게 상업적 목적의 공격적 홍보를 하고 있어 모든 세대에 골고루 퍼져 있지 않고 단어적 개념 정리가 돼 있지 않았을 뿐이다.

듣는 것은 읽는 것보다 편리하다. 이를테면 운전을 하면서 음악을 들을 수 있듯이 가사노동을 하면서 한 편의 소설을 들을 수도 있는 것이다. 적절한 효과음과 더불어 듣는 소설은 매력적이다. 소리가 갖는 전달력의 힘 때문이다. 듣는 것은 시선을 집중하고 행동을 정지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여럿이 함께할 수도 있다는 장점을 가진다. 독서에 더 이상의 고립은 필요치 않다. 집중하고 주의를 기울이지 않아도 짬짬이 반복해서 듣다보면 ‘서당개’처럼 무의식중에 지식이라는 풍월을 알게 된다.

골몰하는 노동처럼 독서를 하는 게 아니라 쉬면서 즐길 수 있는 책이 오디오북이고 보면 책을 듣는 사람은 시선을 집중하는 ‘노동’에서 해방되고 독서라는 행위에 시간을 뺏기지 않아도 된다. 한 가족이 각자 할 일을 하면서 함께 한 권의 소설이나 한 편의 시를 감상할 수 있다면 얼마나 효율적인가. 잠자리의 머리맡에서 나직한 목소리로 책을 읽어주는 어머니처럼 혹은 옛이야기를 들려주는 할머니처럼 정서적인 안정을 유도할 수도 있으니.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오디오북의 장점이 있다면 문명의 폐해로 시력이 약해진 사람, 혹은 시력을 잃은 사람들에게 독서의 기회를 손쉽게 마련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굳이 특수 점자책이 아니어도 독서가 가능하니 말이다.

시낭송 음반이나 시노래 음반도 책자와 함께 엮은 사례들이 있다. 덕분에 유명해진 시와 시인도 있고 가수도 있다. 필자도 그런 작업의 일환으로 자작시노래음반(1999 사이렌사이키)을 낸 사람이지만 엄밀히 말해 그것은 오디오북의 개념은 아니었다고 본다.

시대의 환경은 끊임없이 변화와 발전을 요구한다. 그러므로 ‘귀로 읽는 시대’가 열렸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지만 여전히 문제는 남아있다. 유통상의 문제와 대중성을 확보하는 문제, 기술적인 전문성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한 책은 종이와 활자로 구성된 ‘고상한 물건’이며, 책을 읽는 작업은 고독하고 조용한 작업이라는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얼마나 보편적으로 자리매김을 하느냐 하는 문제가 남는다.

새 신발은 처음엔 뒤꿈치를 벗겨지게 한다. 새 신발이 편안한 신발이 되게 하려면 밴드를 붙이고서라도 자꾸 신어서 발에 잘 맞게 길들이는 수밖에 없다. 오디오북이라는 새 신발을 편안하게 하려면 출판사들의 인식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물론 영세한 출판업계에 대고 이런 소리 하는 것은 심사를 불편하게 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왕따’가 아닌 ‘벗’으로 다가갈 방법이 있다면 거듭나려는 노력은 필요한 것이다.

분명코 머지않아 도서매장에 오디오북이 진열돼 팔리고 오디오북 전문 출판사가 여럿 생겨날 것이라 믿는다. 노래가 된 좋은 시 한 편을 길거리에서 흥얼거리고, 복고풍으로 혹은 서당개처럼 책과 글이란 것이 친근하게 다가서길 희망해본다.

위승희(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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