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 '모럴해저드'와 신뢰사회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정부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각 부문의 경제개혁이 제대로 실천에 옮겨지지 못하고 제자리걸음만 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의 신뢰도가 낮기 때문이다.

개혁을 추진하는 사람과 개혁대상간에 신뢰관계가 없다. 다시 말해 개혁은 내가 아니라 남이 하는 것이고 개혁은 좋지만 내 권리와 이익은 건드리면 안된다는 뜻이다.

조금 의미는 다르지만 요즘 같이 경제도 어렵고 한쪽에서는 구조조정의 서슬이 시퍼렇지만 이익만 챙기고 의무는 다하지 않는 현상을 두고 '도덕적 해이 (모럴 해저드)' 라는 말이 유행이다.

정부는 은행을, 은행은 기업을, 기업은 노조를, 노조는 자기 이외에는 모두가 도덕적 해이 상태에 있다고 비난하고 있다. 이 상태에서 모든 사람을 만족시킬 수 있는 경제개혁이 과연 가능할 것인가를 생각하면 절망적인 생각까지 든다.

정부가 아무리 기업의 과다한 부채를 줄이고 핵심사업이라도 팔아 재무구조를 개선하라고 요청·당부, 그리고 협박까지 해봐도 통하지 않는다. 기업은 금융부문부터 개혁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김우중 (金宇中) 차기전경련회장은 파이낸셜타임스지가 주최한 코리아 국제콘퍼런스에서의 주제연설을 통해 금융권이 하루빨리 제구실을 할 수 있도록 체제를 정비하고 무역금융과 시중자금 흐름을 정상화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金회장의 이같은 주장은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앞으로 3년간 매년 5백억달러의 무역흑자를 내야 하고 그러자면 보유외환을 수출지원에 돌려야 한다는 경제계 의견을 대변하고 있다.

여기서 유의해야 할 점은 金회장을 포함해 기업계가 금융개혁부터 하라고 요구할 때의 금융계는 여전히 정부의 지시 아래 있음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말을 다시 풀어 보면 기업보고 개혁하라고 하기 전에 정부가 할 수 있는 구조조정부터 하라는 얘기나 다름없다.

따라서 현재 진행중인 경제개혁은 일단 외환위기가 해소된 다음에는 서로를 묶고 있던 공통적인 '공멸의 위기감' 이 없어져 정부와 기업간의 신뢰가 다시 사라졌기 때문에 지지부진한 것이다.

바로 이같은 불신상황 속에서 서로가 서로를 비난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도덕적 해이' 라는 개념은 새로운 의미를 갖는다. 다시 말해 정부와 기업간에 개혁의 방향과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도덕적 해이가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이 점에서 당초 개혁의 기본철학을 제대로 정립하지 못하고 일관되게 기업을 설득하지 못한 것은 정부에 책임이 있다. 기업은 당초 개혁의 밑그림이 정부가 아닌 국제통화기금 (IMF) 으로부터 제시됐다고 봤고, 위기가 없어진 다음에 지켜야 할 당위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정부가 아무리 강도 높은 개혁을 주문해도 바로 옆에서 '협조융자' 다 '화의' 다 해서 도덕적 해이가 벌어지고 환란의 직접적 원인을 제공했다는 한보나 기아가 아직도 합리적으로 처리되지 않고 있다. 기업입장에서는 '소나기만 피하면 된다' 고 생각할 인센티브는 충분하지만 헐값에 알짜기업을 내놓을 유인 (誘引) 은 거의 없는 셈이다.

경제개혁을 추구하는 정부전략은 '바람론' 과 '햇볕론' 으로 단순화하면 기업을 바람으로 벗기려 하지 말고 따뜻한 햇볕으로 해야 한다. 후자의 방법이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는 수레의 두 바퀴라고 역설한 김대중대통령의 경제관에 부합한다고 믿는다.

'역사의 종언과 최후의 인간' 이라는, 세계적으로 논쟁의 대상이 된 책으로 유명해진 미국의 후쿠야마교수는 신뢰라는, 공동체가 공유하는 사회적 기준이 어떻게 경제발전에 도움이 되는가를 논증한 바 있다.

신뢰가 갖는 경제적 중요성은 그것이 효율적 시장경제의 운영에 중요한 거래비용 (트랜잭션 코스트) 을 낮추는 데 일익을 담당한다. 거래비용은 노벨상을 수상한 노스교수가 대변하는 신제도학파가 중시하는 용어로 일반적으로 시장경제체제를 유지하는 비용이라고 보면 된다.

정부가 경제개혁을 추진하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거래비용을 최소화하는 대안을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러자면 정부가 기업의 신뢰를 얻어야 하는데 그 길은 엄포를 놓는 것이 아니라 부실은행이나 기업을 원칙대로 하나씩 처리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장현준 논설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