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전 ‘탄핵의 아픔’ 허정무 “남아공 가서 한풀이하겠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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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한국 축구대표팀 감독은 거스 히딩크가 아니라 허정무일 수도 있었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이 끝나고 허정무는 축구 대표팀 감독에 올랐다. 대과가 없으면 2002년까지 지휘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렇지만 시운이 닿지 않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 조별리그에서 2승1패를 거뒀지만 스페인·칠레에 골득실에서 밀려 탈락했다. 같은 해 가을 레바논에서 열린 아시안컵에서는 3위를 차지했지만 경기 내용이 팬들을 만족시키지 못했다. “허정무 체제로 2002년 월드컵을 치를 수는 없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자진 사퇴 형식으로 물러났지만 ‘탄핵’이나 다름없었다.

◆‘독이 든 성배’를 받아=9년 전 중동(레바논)에서 좌초됐던 월드컵을 향한 허정무 감독의 꿈이 중동에서 부활했다. 그는 7일(한국시간)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알막툼 경기장에서 UAE를 2-0으로 꺾고 월드컵 본선 진출을 확정 지은 뒤 선수들의 헹가래를 받았다.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에 복귀한 건 18개월 전인 2007년 12월이다. 그가 낙마하면서 시작된 히딩크-코엘류-본프레레-아드보카트-베어벡의 외국인 감독 시대가 그의 재등장으로 막을 내렸다. 베어벡이 떠난 후 수개월 동안 외국인 명장을 찾다가 실패한 대한축구협회가 초읽기에 몰려 뽑아든 카드였다. “고작 허정무냐”는 팬들의 조소, “안 하면 좋겠다”는 가족의 만류 속에서 ‘독이 든 성배’를 받아든 그는 “축구 인생이 아니라 내 인생을 걸었다”고 비장한 출사표를 던졌다.

◆귀를 열고 권한을 나눠=돌아온 허정무는 달라져 있었다. 이름값 있고 검증된 선수를 선호하던 그가 이름 없는 신예들에게 척척 기회를 줬다. 황재원·최효진(이상 포항), 구자철(제주), 하대성(전북) 등이 A매치 데뷔전을 치렀다. 곽태휘(전남), 기성용·이청용(이상 서울) 등 새 얼굴들이 ‘허정무의 황태자’로 탄생했다.

손아귀에 모든 것을 틀어쥐었던 예전과 달리 귀는 열고 권한은 나눴다. A매치 때 벤치에서는 정해성 코치의 목소리가 더 크다.

9년 전 식사 시간은 군대처럼 조용했는데 지금은 시장바닥처럼 시끌벅적하다. 지금도 허 감독이 쉬운 사람은 아니지만 선수들은 예전처럼 그를 무서워하지 않는다. 연습경기조차 지는 걸 싫어하는 소심한 승부사였지만 지금은 져도 되는 경기와 놓쳐선 안 될 경기에 완급을 주며 페이스를 조절한다. UAE전을 앞두고 오만과의 평가전에서 0-0으로 비겼을 때도 그는 조바심 내지 않았다.

UAE전을 승리로 이끈 허정무 감독은 “선수들이 열심히 잘해 줬다. 코칭스태프도 수고 많았다. 팬들에게 고맙고 너무나 기쁘다”며 모든 공을 다른 사람들에게 돌렸다.

◆비아냥을 넘어 본선행=고비도 있었다. 지난해 6월엔 요르단·투르크메니스탄과 월드컵 2차 예선에서 잇따라 답답한 경기를 펼쳐 ‘허무축구’ ‘허접무’라는 비아냥을 들었다. 그러나 그런 위기가 있었기에 ‘주장 박지성’이라는 묘수가 나왔다. 박지성이 주장 완장을 찬 경기에서 한국은 5승2무를 기록했다. UAE전을 마친 후 그는 “홀가분하다”며 어린 아이처럼 웃었다.

만일 2002년 월드컵을 허정무 체제로 치렀다면 어떻게 됐을까. 허 감독은 “히딩크가 한국 축구를 바꾼 건 사실”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그는 “박지성·송종국·이영표 등 2002년 월드컵 주역은 내가 처음 대표팀에 발탁한 자원들이었다”며 “아쉬움이 남았던 것도 사실”이라고 했다.

그는 “한국이 아닌 외국에서 열리는 월드컵에서 사상 처음 16강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에게는 한국인 지도자도 외국인 감독 못지않게 본선에서 성과를 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할 책임이 있다.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사령탑 복귀 후 칠레와 첫 경기에 패한 후 11승11무로 무패가도를 달리고 있다. 하지만 상대국은 모두 아시아 국가였다. 허정무 감독은 본선행을 확정한 직후 “한풀이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목표는 높을수록 좋다. 어웨이에서는 16강에 가 보지 못했다. 일단 16강이 목표다. 우리 팀은 일단 16강에 오른 후 불이 붙으면 무섭지 않은가”라며 자신의 목표를 구체적으로 설명했다. 그의 새로운 시작은 이제부터다.

두바이(UAE)=이해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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