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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의 배짱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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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5호 14면

원래 ‘남자는 배짱, 여자는 절개’라는 말이 있다지만 우리 집의 경우는 반대다. 배짱은 아내가 훨씬 두둑하다. 그렇다고 내가 절개를 지키는 사람은 아니다. 나로 말하자면 ‘성격은 대쪽 같지만 불의를 보고 참는’ 사람이다.
요즘 아내는 내 얼굴만 보면 걸핏 이런 소리를 한다.

남편은 모른다

“이혼하자.” “못 해.”
“왜?” “귀찮아.”
“당신은 모든 게 다 귀찮아?”
“말 시키지 마. 대답하기도 귀찮으니까.”

내 얼굴이 이혼친화적인가? 남편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얼굴을 살펴본다. 남편이 1980년대에 수시로 불심검문을 당한 것이 꼭 시대 탓만은 아니다. 아내는 이혼친화적인 용의자를 돌려 세운다.

“그러니까 이혼해. 내가 귀찮게 하잖아.”
“그렇게 이혼이 하고 싶어?”
“응. 꼭 하고 싶어.”
“그러면 해. 대신 합의는 못 하니까 소송해.”
“소송은 왜? 당신 혹시 돈 벌게 해 줘야 하는 변호사 애인이라도 있는 거야?”

있으면 좋겠지만 남편은 없다, 어이가. 이럴 때 필요한 것은 국면 전환이다. 아내의 장점 중 하나는 화제가 바뀌면 원래 이야기는 까맣게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근데 내 검정 재킷 어디 있어?”
“찾아봐.”
“찾아도 없으니까 그렇지.”
“안방 옷걸이에 걸려 있잖아.”
“거기 없던데.”

남편은 아내의 이혼 요구에서 벗어나 유유히 안방으로 사라진다. 나는 옷걸이를 뒤진다. 그래도 검정 재킷은 보이지 않는다. 남편은 물건 찾는 데 영 소질이 없다. 두 번을 샅샅이 뒤졌는데도 없다. 아내는 물건 정리도 잘하고 찾기도 잘한다. 집 안의 물건을 아내가 정리하기 때문에 아내가 잘 찾는 것이다. 남편은 자기 물건도 자신이 정리하지 않는 사람이다. ‘성격은 깔끔하지만 어질러진 것을 보고 참는’ 사람이다. 게으른 남편이 찾을 줄 아는 것이라곤 아내뿐이다.

“없잖아.”
“거기 있다니까.”
“옷을 수납한 게 아니라 은닉한 거네. 옷이 무슨 이중장부야? 당신이 찾아봐.”
아내는 옷걸이에서 금방 내 검정 재킷을 찾는다.
“아, 이게 뒤집어져 있으니까 못 찾았잖아.”
“어린애도 아니고 오십이 다 되어 가는 사람이 자기 옷도 하나 못 찾아 입으니.”
입으로는 혀를 차지만 아내의 얼굴에는 흐뭇한 웃음이 번진다. 남편은 혼자서는 도무지 살아갈 수 없는 존재다.

“그리고 제발 옷 좀 바꿔 입고 다녀요. 만날 그 검정 재킷만 입지 말고. 당신 그러면 사람들이 누구 욕하는 줄 알아? 술도 좀 적게 마시고.”
이혼하자고 아내가 배짱을 부려도 남편은 절개를 지켜야 하는 이유가 다 있었던 것이다.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대한민국 유부남헌장』과 『남편생태보고서』책을 썼다. 결혼정보회사 듀오에서 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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