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포커스]미국, 언제 어떻게 기울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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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이웃집 주부와 이야기를 나누다 미국에서 영화 타이타닉이 왜 몇 번씩 만들어지고 그때마다 많은 미국인들이 보고 또 보는지 물어 봤다. "누구에게나 어떤 일이든 닥칠 수 있다는 생각이 미국인들의 의식에 짙게 깔려 있기 때문" 이라는 것이 서슴없는 대답이었다. 미국은 지금 태평성대다.

'황금의 50년대' 보다 더 긴 호황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영화비평가도 아니고 사회심리학자도 아닌 40대 중산층 주부가 타이타닉을 세번씩이나 보면서 느낀 재미와 감동의 수면 (水面) 밑에 '언제든 닥칠 수 있는 위기' 가 가라앉아 있음을 말하고 있다.

위기의 미국 - .유일한 초강대국으로 8년째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미국의 현상황은 이렇게 역설적으로 설명된다. 현재 미국의 태평성대는 위기가 없어서가 아니라, 위기를 잘 다루고 앞으로의 위기에 미리 대처하는 위기관리시스템이 잘 돌아가고 있는 것으로 봐야 하기 때문이다.

르윈스키 스캔들 이후 미국언론들은 '대통령의 위기' 를 줄곧 뒤쫓고 있다.

특별검사는 대통령의 탄핵을 부를 수 있는 법적 증거를 찾으려 증인들을 계속 불러 댄다. 국내의 이같은 상황을 뒤로 하고 아프리카 순방 길에 오른 클린턴 대통령을 클린턴의 1급참모였던 딕 모리스가 최근 꼬집고 나섰다.

"백악관은 대통령 없이도 돌아가는 '자동조종 (오토 파일럿)' 체제다.

그렇기로서니 국내 스캔들과의 절연을 위해 올해 남은 기간의 36%를 아프리카.중국 등 해외순방과 휴가에 써서야 되겠는가."

클린턴은 뒤가 뜨끔하겠지만 미국인들은 이 말에 적이 안심할 것이다.

대통령 하나쯤 없어도 백악관은 조직과 시스템으로 움직이게 돼 있다는 말 아닌가. 어느 대통령에게든 닥칠 수 있는 대통령의 위기에 미국은 이렇게 미리 대처해 놓고 있다. 아칸소주의 중학생들이 총질 살인극을 벌이고 세계 25개국 고교생중 미국학생들의 수학.과학 실력이 바닥이라는 '교육위기' 도 요즘 미국사회를 들썩이게 하는 큰 이슈다.

그러나 미국의 청소년 살인범죄는 90년 이후 계속 줄고 있다.

총기난사사건이 터진 존즈버러 같은 농촌지역의 경우 청소년 10만명당 살인범죄율이 96년에 0.517이었다.

또 미국 고교생들은 매년 세계 각국 학생들과 수학.과학 실력을 겨룰 때마다 부모들을 위기감 속으로 몰아넣곤 하지만 '멍청한 학생에 수재 (秀才) 경제?' 라는 말이 나올 만큼 대학.성인교육 전체를 아우르는 미국교육의 우수성에 대한 미국인들의 긍지는 매우 높다.

그럼에도 교육의 '위기 제로' 를 추구하는 미국 제도는 엄격하기 짝이 없다.

버지니아주에서 청소년이 담배를 피우다 들키면 부모와 함께 '마약퇴치 프로그램' 에 몇 달씩 다니며 '갱생교육' 을 받아야 한다.

21세기를 준비하는 미국의 자세도 '위기대처' 에서 시작된다.

미중앙정보국 (CIA) 이 중심이 된 국가정보위 (NIC) 는 96년 가을 각계 전문가들을 모아 2010년의 세계가 어떤 모습일지를 국가안보라는 관점에서 정리해 대통령을 비롯한 주요 인사들에게 제공했다.

"정책입안자들이 '오늘의 위기' 만을 다루는 좁은 시야에서 벗어나 미래를 규정할 새로운 추세들을 안보.경제 측면에서 이해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 이었다.

일부만 공개된 이 보고서는 인구증가.노령화.불균등성장.정보혁신.기아.에너지 등의 위기가 미국사회는 물론 멕시코.사우디아라비아.중국.러시아 등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국가들에 미칠 영향을 분석하고 있다.

미국의 미래 안보를 보장하려면 세계의 위기를 관리해야 하며 군사.전쟁보다 인구.경제.정보 등 소프트웨어가 위기관리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미국은 언제, 어떻게 기울까 - . 계속 잘 나가는 미국을 보면서 요즘 머리를 떠나지 않는 의문이다.

대답은 쉽지 않다. 그러나 위기 (크라이시스) 라는 말이 미국처럼 자주 쓰이는 나라가 드문 것을 보면 미국이 쉽게 '20세기의 로마' 가 되지는 않을 것 같다.

김수길〈워싱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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