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러 힘 빠지자 위험 자산으로 자금 이동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8면

달러가 고개를 숙였다. 금융위기 이후 글로벌 자금의 ‘최후의 도피처’로 부각됐던 달러였다. 하지만 지난 3월 이후 시세가 꺾이기 시작하더니 최근엔 약세가 더욱 뚜렷해지고 있다. 달러 약세는 금융시장의 불안이 해소되고 있다는 신호다. 즉 달러 우산 아래 피신해 있던 글로벌 자금이 신흥국 주식과 채권, 원자재 등 위험한 자산으로 옮겨간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 덕에 선진국에 비해 신흥국 증시가 눈에 띄게 선전하는 디커플링(비동조화) 현상이 본격화될 것이란 기대도 일고 있다. 하지만 이런 흐름이 오래 가기를 바라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많다.

◆원자재·신흥 시장 수혜=지난주 주요 6개국 통화에 대한 달러의 평균 가치를 매기는 달러인덱스는 3.9% 급락했다. 달러화는 유로화에 대해 4개월 만에 최저치로 떨어졌다. 엔화에 대해서도 2개월 만에 최저 수준을 보이고 있다. 반면 신흥시장 통화는 강세다. 최근 3개월 새 달러 대비 중남미 통화는 8.07%, 아시아 통화는 8.26% 각각 절상됐다. 특히 이 기간 원화는 달러화에 대해 20.4% 상승했다.


달러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꽁꽁 얼어붙었던 글로벌 자금시장의 해빙을 의미한다. 미래에셋증권 이재훈 연구원은 “선진국의 머니마켓펀드(MMF)에서 돈이 빠지는 대신 신흥시장 주식과 원자재 등 위험 자산으로는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고 말했다. 한국 등을 투자 대상으로 하는 주요 신흥시장 펀드로는 10주 연속, 원자재 펀드로는 6주 연속 자금이 순유입됐다. 게다가 최근에는 자금 유입 대상이 아시아·라틴 아메리카 펀드를 넘어 동유럽 펀드와 신흥시장 채권 등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다.

이런 기대감에 국내 투자 자금도 신흥시장 펀드로 몰리고 있다. 국내 주식형 펀드에서는 돈이 빠져나가고 있지만 중국·브라질·러시아·인도 등 브릭스 지역 투자 펀드로는 이달 들어서만 3996억원이 흘러 들어갔다.

◆디커플링, 장기화는 난망=하지만 최근 달러화 약세는 마냥 반길 수만은 없다는 지적이다. 특히 지난주 급락이 그렇다. 글로벌 금융시장의 해빙 측면보다는 미국 경제에 대한 불안감이 달러 약세의 주요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미래에셋증권 박희찬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재정적자가 큰 폭으로 확대되고, 자칫 국가 신용등급까지 하향 조정될 수 있다는 우려까지 나오면서 ‘셀 USA’ 양상이 빚어졌다”고 분석했다. 게다가 미 국채에서 돈이 빠져 나가면서 국채 금리는 급등했다. 국채 금리 상승은 주택담보대출 금리 등을 자극해 미국 가계의 소비 회복에도 악영향을 줄 수 있다. 이재훈 연구원은 “미국 등 선진국의 소비와 고용이 개선되지 않으면 아시아 증시의 상승세도 제한을 받을 수밖에 없다”며 “시차는 있겠지만 글로벌 경기는 결국 같이 가는 것으로 디커플링이 오래 지속되기를 기대하는 것은 무리”라고 말했다.

신흥시장으로의 자금 유입도 속도 조절에 들어갈 가능성이 있다. 박희찬 이코노미스트는 “선진국들이 경기 부양을 위해 국채 발행을 늘리고, 금융권 부실을 메우는 데 자금을 투입하기 시작하면 전 세계에 풀린 돈을 다시 빨아들이게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조민근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