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풍 미스테리]북한, 계산된 '밀월'…안기부 놀아났을 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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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북풍 (北風) 공작과 수사를 둘러싼 갖가지 정보.루머가 넘쳐나고 있다.

정치권이 숨죽이는 가운데 국민들의 의문은 커져만 가고 있다.

나종일 (羅鍾一) 안기부 2차장은 17일 "북풍 진상이 밝혀지는 것이 왜곡됐던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는데 도움이 될 것" 이라고 말해 북풍 진상 조사의 당위론을 강조했다.

원론적으로 옳은 얘기다.

북풍진상 규명으로 남북관계가 새롭게 정립될 수도 있다는 뜻에서다.

그러나 일부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북풍공작의 전모를 밝히는 것이 '판도라 상자' 를 여는 것이 될 수 있다고 본다.

안기부 이대성 전해외조사실장이 국민회의 정대철 (鄭大哲) 의원측에 넘겼다는 문서철이 남북한간의 각종 접촉채널을 통한 거래와 공작이 얽힌 '시한폭탄' 적 성격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남북한의 정보기관은 실제로 지난 수년간 베이징.선양 등지를 무대로 얽히고 설킨 공작을 진행해 왔다.

당국간 공식관계가 경색되고 대결적인 국면에서는 극히 부분적으로 경협 등을 통한 민간교류가 진행되고 교류.접촉의 뒤편에서 '공작' 적 요소가 도사릴 수밖에 없었다.

심지어 남북정상회담을 실현하기 위한 '비선' 접촉에 관한 첩보도 끊이지 않았다.

휴전선에서 1백만명 이상의 병력이 대치하고 있는 이면에 남북의 공작원들은 적이지만 때로는 협력자로 공생하는 '적과의 동침' 경우도 있을 수 있던 것이다.

또한 남북 당국간 관계가 나빠질대로 나빠진 상황에서 공작원들은 상대측의 정보를 입수하기 위해, 혹은 정권안보를 위한 정치적 목적에서 일상적인 정보.공작활동을 벌여온게 사실이다.

한국 정보기관은 김정일 (金正日) 정권의 안정성 여부를 확인하는 정보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베일에 싸여있는 김정일의 측근이나 그에 근접한 북한의 무역기관 관계자들을 매수하는 방법이 사용된 흔적이 있다.

북측 정보기관은 한국사회의 교란이 주목적이고 대통령선거는 중요한 공작대상이 된다.

북측이 한국의 정치상황에 개입하려 했던 것은 당연한지 모른다.

안기부 일각에서 나오는 얘기로는 지난해 5월 이후 북측이 남북접촉의 모든 창구를 통해 'DJ대통령 불원론 (不願論)' 을 퍼뜨렸다고 한다.

북측은 대남접촉 창구를 통해 이같은 정보를 흘려 한국 정보당국에 혼선을 준 것으로 보인다.

우리측은 다양한 창구로 북측의 진의 읽기에 나섰으나 결국 북측의 '김대중대통령 기피' 의지를 믿고 10월 이후 '대북거래' 에 나섰다는 것이다.

물론 안기부가 먼저 북풍공작계획을 갖고 북측에 접근을 시도했다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어느 측이 '장난' 을 시작했는지 못지 않게 북풍공작의 결과와 후유증이 우리 사회를 뒤흔들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일부 북한문제 전문가들은 결과적으로 안기부가 북한과의 정보전쟁에서 패배했다는 결론을 내리고 있다.

북측은 한국 대선에서 누가 당선돼도 유리한 게임을 했다는 진단이다.

즉 북풍공작에서 안기부의 요청에 응해 이회창 (李會昌) 씨가 대선에서 승리하면 양 측면의 과실을 얻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하나는 선거협조로 발목을 잡아 대북 경제지원을 얻을 수 있는 카드가 확보된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북한이 정권안보 차원에서 남북 당국간 대화를 원하지 않는 국면이면 하시라도 새 정권을 과거 정권의 연장으로 몰아붙여 대화를 회피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DJ가 당선되면 우선 북풍공작에 관여한 안기부의 대북 핵심기구 개편과 인력들에 대한 처벌이 불가피할 것이고, 이에 따라 안기부가 약화될 수 있다는 계산을 했을 것이란 지적이다.

또한 안기부가 대북팀을 새로 만들어간다고 해도 시간이 걸릴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남북대화의 창구일원화 원칙이 깨져 북측의 대남정책 전개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될 수 있다는 것이다.

새 정부는 지금 북풍공작의 전모를 밝힘으로써 남북관계를 정상화하려고 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자칫 남북관계를 후퇴시킬 수 있다고 지적하는 전문가들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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