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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적질 ‘공인’했던 16세기 유럽 지금은 소말리아 해적에 골머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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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소말리아 해역에서 한국 선박의 호송 임무를 맡고 있는 청해부대가 해적 퇴치에 큰 성과를 올리고 있다. 오늘날의 국제법에서는 공해상에서 사적 목적을 위해 선박에 대한 약탈과 폭행을 자행해 해상 항행을 위험하게 하는 자를 해적이라 하고, 그 약탈과 폭행을 해적 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그러나 16세기 서양 해적은 버젓이 정부와 계약을 맺고 해적 행위를 했다. 이즈음은 국가가 바다를 통제하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해적이 국가를 대신해 무력을 행사했다. 콜럼버스 이후 대항해시대가 열리면서 유럽 각국이 해상에서 서로 경쟁을 벌일 때 각국 정부는 무장한 민간 선박에 공식적으로 권리를 주면서 적국의 배를 공격하도록 부추겼다. 정부가 담당해야 할 전쟁 임무를 민간에 ‘아웃소싱’한 셈이다. 이들을 사략선(私掠船)업자(privateer)라고 한다.

사략선업자의 대표적 인물은 영국의 프랜시스 드레이크(그림·1540~1596)였다. 가히 해적사의 전설이라고 할 만한 인물이었다. 그는 1579년 남아메리카 태평양 연안에서 스페인 선박 카카푸에고호를 나포해 재물을 약탈했다. 은 26t, 금 80파운드 등 어마어마한 재물이었다. 화물을 옮겨 싣는 데만 나흘이 걸렸을 정도다. 드레이크는 화물을 모두 빼앗은 후 배는 스페인 측에 되돌려주었고 그 배의 선장에게는 ‘약탈물품 명세서’를 써줬다. 혹시 스페인 정부로부터 선장 자신이 화물을 빼돌린 게 아니냐는 추궁을 받지 않도록 배려한 것이다. 한술 더 떠서 항해 중 다른 영국 사략선에 또 나포되었을 경우를 대비해 안전통행증까지 써줬다. 영국 신사(!)다운 행동이었다.

1580년 드레이크는 엄청난 노획물을 가지고 플리머스 항구로 들어왔다. 그가 탈취한 재물은 약 50만 파운드에 달했고, 그 3분의 1에 해당하는 16만3000파운드를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안겨줬다. 이 때문에 고귀한 신분의 엘리자베스에게 ‘해적여왕’이라는 험악한 칭호가 붙게 됐다. 여왕은 드레이크가 가져온 에메랄드를 자신의 왕관에 박아 넣기도 했다. 여왕은 1581년 드레이크에게 기사 작위를 내렸고 그는 국민 영웅으로 떠올랐다. 영국 정부는 ‘합법적인 마피아’와 다름없었고 왕실해군은 ‘허가받은 해적’과 마찬가지였다. 1588년 드레이크가 눈부시게 활약한 영국 함대는 세계 최강의 스페인 무적함대를 격파했다. 해적은 어떤 의미에서 해군의 선구적 형태였던 셈이다. 바다에서의 폭력을 국가가 직접 통제하기 시작한 것은 19세기 이후의 일이다.

박상익(우석대 역사교육과 교수·서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