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3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그 놈의 체면 때문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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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면

<결승 1국> ○·쿵제 7단 ●·이세돌 9단

제14보(102~109)=큰일이다. 흐름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시간 연장책으로 둔 백△의 응수 타진이 박정상 9단의 예측 그대로 패착으로 변해가고 있다. 그 한 수가 준 빈틈을 낚아채 전광석화와 같이 판을 뒤집어버린 이세돌의 전투 감각은 과연 천하일품이다.

살기 위해 106까지 무려 세 수를 들여 두 점을 잡았다. 애당초 죽어 있던 돌을 잡기 위해 백은 제자리걸음을 거듭하고 중앙엔 우수수 흑의 군사가 쌓여간다. 그렇게 몰매를 맞는 동안 백△는 저 멀리서 구경만 하고 있다. 쿵제 7단은 하도 후회스러워 거듭 땀을 닦아내고 있다. 백△가 107 자리에 놓였더라면 전황은 180도 달랐을 것이다. 백이 공격하고 흑은 쫓겼을 것이다. 중앙은 백의 주도권 아래 들어갔을 것이다. 107이 떨어졌을 때 쿵제는 이판사판의 심정이 되고 만다. 지금이라도 ‘참고도’ 백1로 뛰어 두면 약간 불리하지만 긴 승부다. 그러나 실컷 매를 맞고 이곳을 후수로 두자니 흑2가 뻔하다. 백△의 체면이 휴지조각처럼 구겨지고 만다.

쿵제는 두 눈 딱 감고 108로 젖혔다. 무리수라는 걸 알고 있지만 백△의 체면을 이렇게라도 세워주고 싶었다. 그러나 109로 막히자 갑자기 중앙 일대가 새카매졌다. 흑의 엷음은 깡그리 사라졌고 자칫 통집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더구나 갇힌 백 대마는 후수로 살아야 한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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