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의 눈]DJ납치 일본도 피해자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정부는 도쿄의 호텔에 체재하고 있던 그 (金大中 대통령) 를 대낮에 납치, 서울로 끌고 가는 폭거를 했다….” 옛 공보처가 金대통령 취임식에 앞서 발행한 일본어판 인물소개 팸플릿에 들어 있는 金대통령의 약력 가운데 일부분이다.

일본의 요미우리 (讀賣) 신문은 이를 지난달 25일자 7면에 '김대중씨 한국 정부가 납치' '공보처 팸플릿에 명기' 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

이 신문은 왜 새삼스러울 것이 없는 구문을 마치 새로운 뉴스인 것처럼 보도했을까. 그것은 아직 한.일 양국 정부가 공식적으로 한국 정부에 의해 납치사건이 자행됐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사건은 당시 김종필 (金鍾泌) 총리가 진사 (陳謝) 사절로 일본에 가서 유감을 표시하고 일본이 이를 양해, 일단락 됐었다.

당시 일본 야당과 언론은 '한국 공권력에 의한 일본주권침해' 라며 한국 정부의 사과와 '원상회복' 을 요구했다.

金대통령은 취임식 축하사절로 온 일.한의원연맹 관계자들에게 납치사건을 '인권문제' 로 거론하면서 진상이 밝혀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물론 역사의 진실은 밝혀야 한다.

그러나 마치 일본이 잘못한 것처럼 '인권경시' 나 '진상규명' 을 요구할 때 그들이 받는 느낌은 어떨까. 요미우리도 그런 맥락에서 공보처의 팸플릿을 뉴스로 취급한 것 같다.

사실 이 사건은 한국 정부에 의해 그들의 주권이 유린된 것으로 일본도 피해자다.

이 사건에 관한 한 한국은 가해자다.

진상규명으로 일본이 손해볼 것은 없다.

한국 정부가 원해 그렇게 처리한 것 뿐이기 때문이다.

군국주의가 저지른 침략의 죄과를 현재의 일본 정부가 떠맡아야 하는 것처럼 일본이 문제삼으면 피해당사자인 金대통령이 정부를 대표해 책임져야 하는 아이러니도 생길 수 있다.

국가간에 외교문제로 비화할 수 있는 것은 말 하나라도 신중히 해야 한다.

그런데 우리는 공보처의 팸플릿에서 나타난 것처럼 왕왕 신중함이 모자라는 것 같다.

특히 일본에 관해서는 과거 그들이 우리에게 지은 죄 때문인지 절제되지 않은 말들을 쏟아 놓기 일쑤다.

95년 11월 식민정책을 미화한 에토 다카미 (江藤降美) 일본 총무처장관의 망언이 나오자 “일본의 버르장머리를 가르쳐주겠다…” 던 김영삼 (金泳三) 전대통령의 발언은 그 백미라 할 수 있다.

일본이 어업협정을 파기하자 “홋카이도 (北海道) 근해 어족의 씨를 말리겠다” 며 대응한 해양수산부장관의 최근 발언도 좋은 예다.

金대통령은 지난달 26일 취임 축하를 위해 방한한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曾根康弘).다케시타 노보루 (竹下登) 일 전총리들과 만난 자리에서 “한.일 관계는 국교정상화 후 지난 33년간 표면적으로 친선을 유지해 왔으나 실질적인 친선에는 큰 진전이 없었다” 며 지금까지의 한.일 관계를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다케시타 전총리는 일.한의원연맹회장으로 한.일 관계를 위해 많은 노력을 해온 일 정계 원로다.

그런 그를 앞에 두고 지난 33년을 부정한 金대통령의 발언도 세련된 외교적 언사는 아닌 것 같다.

YS가 역사바로세우기라는 이름 아래 과거를 모두 부정했을 때 관계자들이 받은 당혹감을 상상해보자. 일본을 잘 모르는 YS정권 등장 후 한.일 관계는 최악의 상태가 됐다.

이는 냉전종식과 일본의 우경화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양국간 외교현안을 막후에서 조정할 채널이 없다는 것도 큰 몫을 했다.

자존심만 내세우고 버티다 보니 그렇게 됐다.

일본도 이제는 과거사 때문에 한국을 특수관계 국가로 인식, 양보하려는 기색이 없다.

한.일어업협정 파기가 좋은 예다.

일본의 이같은 변화를 새 정권은 정확히 인식, 감정이 배제된 냉정한 자세로 대처해야 겠다.

다행히 金대통령은 YS에 비해 일본을 잘 알고 있다.

YS정권처럼 실속없이 큰소리만 쳐 한.일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

외환위기 극복에도 그들의 도움이 필요하다.

한국은 싫으나 좋으나 일본과 더불어 살아가야 할 숙명을 지니고 있다.

이석구〈국제부장〉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