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대통령의 장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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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미국의 역대 대통령 가운데 개인장서가 많기로는 제3대 토머스 제퍼슨이 단연 으뜸이다.

1804년 선거에서 압도적으로 당선해 대통령관저로 들어가게 됐을 때 장서의 진열을 위해 관저 내부를 뜯어고쳐야 할 정도였다.

그의 장서는 어지간한 도서관 규모였던 것이다.

평소 "나는 책 없이는 살 수 없다" 고 입버릇처럼 되뇌었던 그는 대통령의 자리에 오른 후에도 항상 책과 함께 살았다.

대통령이면서 동시에 훌륭한 과학자였고 천부적 언어학자였으니 그가 일평생 책을 가까이 한 것은 당연했다.

바퀴 달린 의자와 회전의자를 발명한 것도, 버지니아대의 건물을 설계한 것도 모두 꾸준한 독서의 힘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불우해 퇴임 후인 1815년 산더미처럼 쌓인 빚을 청산하기 위해 그 많은 장서를 미국 의회에 팔아넘기지 않으면 안됐다.

해리 트루먼이나 존 쿨리지가 역사서에 집착했던 것처럼 특정분야에만 관심을 가진 대통령들이 많았고, 지미 카터처럼 책을 가까이 하려 '애쓴' 대통령도 없지 않았지만 대다수의 대통령들은 책이나 독서와 거리가 멀었다.

특히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재임중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린든 존슨은 대학을 졸업한 후 읽은 책이 겨우 6권뿐이라고 고백한 일도 있다.

독서량이나 장서 수가 대통령의 유.무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는 것은 물론 아니다.

그렇지만 오늘날 전세계의 정치지도자 가운데 꾸준한 독서를 통해 나름대로의 교양과 문화를 골고루 갖춘 사람을 찾아보기란 쉽지 않다.

하기야 다소 여유가 있을 때라면 몰라도 대통령이라는 막중한 자리에 오르면 책을 가까이 할 시간적.정신적 여유가 없을는지 모른다.

하지만 그런 변명이 통하기 때문에 정치가 경색되고 비문화적으로 치닫는 것을 막지 못한다는 논리도 제기된다.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의 독서량과 장서수가 건국 이후 역대 대통령 가운데 으뜸이라고 한다.

2만권에 가까운 장서를 기존의 서재로는 수용할 수 없어 침실 하나를 서고 (書庫) 로 개조한 것도 제퍼슨의 경우와 비슷하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취임한 그가 재임 중에도 계속 책과 가까이 할 수 있을는지, 책을 통한 문화의식이 정치를 어떻게 순화시킬는지 아직 미지수지만 그 방대한 장서만으로도 뭔가 기대를 갖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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