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변호사 커넥션' 회오리…개혁 도화선 될수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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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서울지법 의정부지원 판사들이 무통장 입금 방식으로 변호사 돈을 받은 것은 과거 어떤 고위공직자들의 비리사건보다 훨씬 충격적이다.

설령 판사들의 주장대로 이 돈이 사건처리와 직접 관계가 없고 단순히 변호사들로부터 빌린 돈이라 해도 사안의 심각성은 약해지지 않는다.

판사들을 고도의 청렴성과 도덕성을 갖춘 '정의의 수호자' 로 인식해왔던 일반인들의 통념을 판사들이 스스로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법원 고위 관계자도 16일 "변호사로부터 돈을 빌렸다고 판사들이 해명하고 있지만 사실여부를 떠나 사법부의 중대한 위기사태가 시작됐다" 고 침통해했다.

또 서울지역 판사와 변호사들 사이에서는 "돈을 받은 사실이 드러난 판사들은 현재 재판을 맡을 자격이 없는 만큼 대법원이 해당 판사들의 재판권한을 중지시켜야 한다" 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특히 모든 재판에서 당사자들이 제출한 증거의 채택여부에 대한 권한을 오직 판사에게만 부여하고 있는 대륙법 계통의 우리 사법체제에서 판사의 비리나 부도덕성은 곧바로 재판의 편파.불공정 시비를 부른다.

아직은 검찰수뇌부가 판사.변호사 소환조사를 통해 돈과 사건처리의 상관관계를 규명하려는 의정부지청의 움직임을 막고 있지만 재야법조계와 사회단체 등의 움직임으로 볼때 대법원이 검찰에 수사를 요청하는 형식으로라도 검찰이 수사에 나서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돈을 받은 것으로 드러난 판사들 가운데 일부는 단순한 차용금으로 밝혀지더라도 판사의 청렴성 훼손 차원에서 최소한 판사직에서 물러나야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 때문에 법원.검찰관계자들 사이에 "사법부 개혁이란 지진이 의정부를 진앙지로 해 대법원으로 밀려오고 있다" 고 말하고 있다.

변호사들이 판사들의 개인 계좌번호를 어떻게 알았느냐도 관심의 초점이 되고 있다.

개인 계좌번호는 판사가 알려주지 않고는 변호사들이 알기 어렵다는 점 때문에 검찰관계자들은 두가지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판사들이 변호사들에게 알려준 경우와 사건을 맡은 변호사들이 담당 판사와 친한 변호사를 통해 계좌번호를 알아냈을 경우다.

한편 의정부지청이 판사.변호사들의 '검은 커넥션' 을 찾아낸데는 브로커를 고용해 사건을 수임한 혐의로 구속된 이순호 (李順浩.36) 변호사 사건이 결정적 계기였다.

李변호사가 바로 의정부지원 판사 출신이어서 판사들이 '전관예우 (前官禮遇)' 차원에서 무죄를 선고할지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검찰이 증거보강을 위해 계좌추적용 압수수색영장을 발부받으면서 법원쪽으로 불똥이 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과정에서 법원측은 당시 법원과 검찰이 영장실질심사제 변경을 놓고 감정대립 양상을 보이고 있었던 점을 지적, "검찰이 법원 압박용 카드를 의정부에서 찾고 있다" 는 볼멘 소리가 나오기도 했다.

한편 의정부지청으로부터 구체적 내용을 보고받은 대검수뇌부와 서울지검장 등은 이번 사건이 법원수뇌부의 인책사퇴로도 이어질 수 있는 엄청난 폭발력을 가진 민감한 사안임을 감안해 처리방안을 놓고 골머리를 앓아온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결국 "이 사건을 덮으면 검찰이 법원 압박용으로 판사 뒷조사를 했다는 비난만 받게 된다" 는 대검과 서울지검 소장검사들의 주장및 시민단체 등의 수사압력, "같은 법조인끼리 이러기냐" 는 법원측의 묵시적 압력 사이에서 검찰수뇌부는 당분간 여론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운 뒤 최종 방침을 결정할 것으로 예상된다.

예영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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