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상위원회도 김지하 시 읽었다네요”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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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클레지오가 8일 이화여대 통번역대학원 제자들과 만나 교정에서 담소를 나눴다. 그는 “하버드·MIT 등에서도 가르쳐봤지만 미국 학생들과 비교해서도 이대 학생들은 매우 우수해 웬만하면 A학점을 줄 수밖에 없었다”고 말했다. 딸만 둘을 둔 그는 “ 딸이 아들보다 부모에게 더 잘한다”며 여성 예찬론을 펼쳤다. 김태성 기자

“스웨덴 노벨문학상위원회에 가 보니 한국 도자기도 있고, 한국 문학 책들도 많이 꽂혀있더군요. 한국이 노벨상을 수상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수상자 르 클레지오(69)가 돌아왔다. 2007~2008년 이화여대에서 강의한 일을 “가장 아름다운 추억”이라 기억하는 그는 다시 이대 교정을 찾았다. 며칠 전 입국해 예전에 머물던 이대 기숙사에 짐을 푼 그를 8일 만났다. 명함을 건네자 그는 어설프나마 한글로 적힌 기자의 이름을 읽었다.

◆그가 한국을 사랑하는 이유=르 클레지오가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확정됐을 때 한국도 프랑스 못지 않게 기뻐했다. 역대 어느 노벨상 수상자와도 비교되지 않는 친한파 작가여서다. 그는 “한국인들이 매우 기뻐한다는 걸 느꼈다”며 한국말로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사막』 『섬』 『황금물고기』 등 그의 작품은 물질 문명 이전의 원초적인 삶에 대한 관심으로 가득하다. 모리셔스 섬 출신의 프랑스인인 그는 프랑스 보다 해외에 체류하는 시간이 더 긴 유목민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에 비춰보면 물질문명으로 물들어버린 한국에 애정을 갖는 모습이 언뜻 이해되지 않는다.

“외국인들이 서울에 오면 두려워합니다. 서울의 현대적인 면모만 보기 때문이죠. 자세히 보면 산과 시냇물 등 자연이 함께 있어요. 세계 어느 대도시에 오리가 살 공간이 있겠습니까. 서울은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아름다운 도시예요.”

문화적으로도 그렇단다. 가령, 대학에서 전통의학을 가르친다는 건 프랑스에서는 상상 못할 일이라는 것이다. 전통 약초, 특히 인삼 효능은 여러 번 경험했다고 털어놨다. 한국의 ‘전설’도 매력적이라고 했다. “한 할머니가 호랑이에게 잡혀 먹힐 뻔했는데, 바다에서 용이 나와 구했다는 옛날 이야기를 들었어요. 저는 용이 바다에 사는지도 몰랐거든요.”

제주도 ‘선녀다리’(한국어로 발음했다) 설화도 거론했다. 불도 없이 살던 최초의 인간 앞에 바다 선녀가 나타나 불과 음식과 천 짜는 법, 노래를 가르쳐 문명사회를 만들었다는 이야기다.

“여성이 문명으로 인도했다는 것이죠. 그런 신비스러운 면이 매력적이에요.”

그는 요즘 이대 기숙사에서 환상문학 단편을 쓰고 있다. 전세계에서 사라져버린 ‘선녀’ 이야기가 아직 남아있는 한국이 그런 작품을 쓰기엔 가장 적합하다는 게 이유다. 이달 말까지 한국에 머무는 동안 공식 일정은 최소화했다. 13일 이대학술원 특강, 22일 대산문화재단-이화여대 공동 특강 정도다. 나머지 시간엔 집필에 몰두한다.

르 클레지오가 ‘중앙일보 독자들에게 우정!’이란 메시지를 보내왔다. 위의 프랑스어는 ‘독자들에게’란 뜻이고 아래는 서명이다.

◆소박한 문학의 거장=이대 제자들 사이에서 르 클레지오는 소박하고 검소하기로 유명했다. 노벨상이 그의 인생을 바꿔놓은 것 같진 않았다. 여전히 신촌역 근처 허름한 밥집에서 알밥 먹길 좋아하고, 아침이면 이대에서 봉원사로 이어지는 산책로를 따라 걷길 즐긴다고 했다. 노트북이 없어 기숙사 1층 컴퓨터실에서 집필을 하다 게임을 하느라 떠들어대는 학생들에게 “셧 업(입 다물어)!”이라 소리친 적도 있단다. 그는 전자게임은 싫어하고 동양의 게임인 바둑이나 장기를 좋아한다. 소문난 영화광이기도 하다. 칸영화제 심사위원을 지내기도 한 그는 지난해 출간한 영화 에세이 『발라시네』에 박찬욱·이창동·이정향 감독의 인터뷰를 싣기도 했다.

“박찬욱 감독이 ‘박쥐’를 찍을 때 만났어요. 에밀 졸라의 소설 『테레즈 라캥』에서 모티브를 얻었다는데, 그걸 영상으로 어떻게 빚어냈을지 궁금해요. ‘박쥐’가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탔으면 좋겠는데….”

노벨문학상은 어떤 한국 작가가 탈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하는지 조심스레 물어봤다.

“노벨상위원회에선 불어로 번역된 김지하의 시를 읽었다고 하더군요. 그러나 그런 내용은 보도하지 않는 게 낫지 않을까요? 시인에게 너무 기대감을 갖게하면 자칫 상처가 되니까요. 또, 소설가 황석영이 탈지도 모르고요. 사실 난 지난해 내가 아니라 황석영이 타는 줄 알았어요.”

이경희 기자

◆르 클레지오=2008년 노벨 문학상 수상자인 장 마리 귀스타브 르 클레지오는 ‘프랑스어로 가장 아름다운 글을 쓰는 작가’로 불린다. 1940년 프랑스 니스에서 태어나 유년시절을 아프리카에서 보냈다. 모리셔스와 프랑스 이중국적을 갖고 있다. 멕시코·미국 등지를 끊임없이 돌며 쌓은 체험을 바탕으로 문명을 넘나드는 작품을 남겼다. 『사막』『조서』『섬』『황금물고기』『홍수』 등의 작품이 있다. 이화여대 이화학술원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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