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력이동]6.경찰…'끈' 떨어진 영남출신 간부 안절부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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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15만 경찰의 총수인 황용하 (黃龍河) 경찰청장은 지난 3일 새해가 밝자마자 대통령직인수위 정무분과위원회를 노크했다.

그의 손에는 경찰 정기 인사안이 들려 있었다.

그는 “인사를 미루면 사기가 떨어지고 경제난으로 인한 사회불안 등 치안수요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지휘체계를 손질해야 한다” 고 설명했으나 인수위측은 “기다려라” 는 한마디로 일축했다.

黃청장은 열흘 뒤인 13일 인수위를 다시 찾았다.

탈옥수 신창원 (申昌源) 검거 실패에 따른 경기경찰청장 등 문책인사를 위해서였다.

그는 “영 (令) 을 세워야 한다” 며 김영삼 (金泳三) 대통령의 내락을 받은 인사안을 내밀었으나 인수위 반응은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문책인사안은 대상자를 조정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다음날 인수위를 통과했으나 일련의 사태는 黃청장이 기대했던 영을 세우기는 커녕 반대현상을 가속화하는 결과를 빚고 말았다.

인사에 목을 매는게 공무원이고 경찰도 예외는 아니다.

인수위의 반응은 새 정권 출범 후 큰폭의 인사를 예고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노골적인 눈치 살피기와 새 정권쪽에 줄대기 현상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이 경찰간부 A씨의 말이다.

그는 도대체 명령이 먹혀들지 않고 민생치안은 아예 실종된 상태라고 말했다.

“과거에도 정권교체를 앞두고 인사를 점치며 설왕설래하는 일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마치 인사 보따리가 이미 풀린 것 같습니다.

특히 영호남간의 권력이동이 실감되는 분위기 입니다.”

또 다른 간부 B씨는 경찰총수의 권위를 말 한마디로 무력화시킨 인수위에도 문제가 있지만 권력에 민감한 경찰의 체질에 새삼 비애를 느낀다고 말했다.

24일 경찰청을 방문한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가 “경찰 인사에서 학연.지연을 따지지 말라” 고 했지만 요즘 경찰 주변에는 “국민회의 金모 의원 사무실에 모 총경이 찾아 갔다더라” “고위간부 모씨는 입원중인 金모 의원에게 줄을 대려다 거절당했다더라” 는 등 소문이 퍼져 있다.

또 출신지역에 따른 희비가 엇갈리면서 '잘 나가던' 영남출신 간부들의 표정은 굳어있는 반면 호남출신들은 표정관리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잘 나가던 TK출신 C총경은 자신의 처지를 차 놓친 여행자에 비유한다.

그동안 정성들여 가꿔온 지연.학연 등 '끈' 이 하루아침에 쓸모없게 됐다는 말이다.

그런가 하면 PK출신 한 간부의 말처럼 “그동안 햇볕을 많이 받았으니 이제는 찬바람도 각오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 며 동서 (東西) 간 정권교체의 파장에 순응할 수밖에 없다는 반응도 나온다.

헌정사상 최초의 여야 정권교체와 함께 인사 회오리가 점쳐지면서 가장 관심을 끄는 것이 호남출신 총수 탄생 여부. 지난 45년 국립경찰 창설 이후 51대 黃청장까지 호남출신은 지난 75년 8개월동안 치안본부장을 지낸 장일훈 (張日勳.전남강진) 씨가 유일하다.

또 서울청장은 호남출신이 전무했다.

신임 경찰청장에는 구홍일 (具弘一.54.경북경주) 경찰청 차장.김세옥 (金世鈺.58.전남장흥) 경찰대학장.이필우 (李必雨.61.경기시흥) 서울청장 등 치안정감 3인방의 각축이 될 전망. 이 가운데 전남출신 金학장의 낙점 여부가 관심의 초점이나 그는 김태정 (金泰政) 검찰총장과 같은 장흥출신이라는 점이 약점으로 지적된다.

한 동네에서 검찰.경찰의 총수를 싹쓸이할 경우 모양새가 좋지않기 때문이다.

인사가 개인의 문제라면 당선자측에서 관심을 표명한 '지방경찰제' '수사권 독립' 등은 경찰 체질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조직의 문제. 지방자치단체장에게 경찰의 설치.운영을 맡기는 지방경찰제는 지역실정에 맞는 치안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점이 장점으로, 지방근무 하위직들은 승진기회가 확대된다는 점 때문에 환영하는 분위기. 경찰은 지금까지 “우리나라 실정에 맞지않는 제도…” “통일 후에나 고려해 볼 사안…” 이라고 일축한 전과 (前科) 때문에 침묵을 지키고 있지만 金당선자측이 강한 도입 의지를 보이고 있어 단계적으로 실현될 가능성이 크다.

수사권 독립은 경찰 내부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상해.폭행.교통사고 등 단순범죄에 대해서는 검사의 지휘를 받지 않고 경찰조사만으로 수사를 끝내자는 주장이다.

전체 범죄 가운데 경찰이 94.8%를 직접 검거해 송치하는 현실을 근거로 내세우고 있다.

그러나 검찰에서 인권시비의 가능성과 권한남용 등의 문제점을 지적하며 조직적으로 반대, 실현가능성은 불투명한 상태다.

이처럼 경찰 안팎에서 논의가 활발한 경찰 조직의 문제에 대한 경찰 수뇌부의 반응은 의외로 간단하다.

“우리가 왈가왈부 해봐야 소용없다.

고위층에서 알아서 결정할 것이다.”

권력에 순응하고 그 안에서 보호받아 온 국립경찰의 체질적 한계를 보여주는 이 한마디에는 이번 기회에 경찰이 새로 태어날 수도 있다는 기대가 함께 담겨 있다.

김상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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