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수대] 대내<大內>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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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6면

 몽골의 원(元)을 몰아내고 명(明) 왕실을 세운 주원장(朱元璋)은 환관(宦官)에 의해 정치가 휘둘릴까 늘 걱정이었다. 그는 명 왕실을 세운 뒤 환관들의 정치 참여를 막는 일에 나선다. 각 주요 관공서에 “내신(內臣)들은 정사에 간여할 수 없으며 어기는 자는 사형에 처한다”는 글귀가 새겨진 철비(鐵碑)를 걸게 한다.

중국 역사상 최고 전성기를 구가했던 당(唐)을 비롯한 여러 왕조가 패망에 이른 원인 중의 하나가 환관들의 정치 간여로 인한 국정 혼란에 있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실제 주원장 은 환관들의 벼슬 직위가 4품을 넘지 못하도록 규정하는가 하면, 이들이 아예 글을 배우지 못하도록 했다.

주원장이 그렇게 조바심을 냈던 환관의 폐해는 공교롭게도 명 왕조의 멸망을 부르는 결과로 작용한다. 명 말엽에 활동했던 위충현(魏忠賢)을 비롯해 왕진(王振) 등 희대의 환관들이 발호했기 때문이다.

주원장이 경계한 환관, 즉 내신은 황제를 옆에서 보필하며 정무를 돌보는 존재들이다. 명 말에 보통 “궁녀 9000명에 내감(內監·환관) 10만 명…”이라는 기록이 전해지고, 1911년 중국 신해혁명이 발발할 당시의 청(淸) 왕실에 여전히 3000명의 환관이 활동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이들이 보필하는 황제의 주변을 보통 ‘대내(大內)’라고 부른다. 원래는 왕실의 창고라는 뜻이었으나 후대에는 왕궁, 또는 왕의 주변 인물과 기관을 뜻하는 말로 전의된다. 조선에서도 왕궁을 이런 말로 불렀다.

대내의 환관 등이 절대 권력자였던 군주를 보필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나름대로의 참모 역할을 수행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권력이 도를 넘어서면 문제다. 월권 행위가 잦아지면서 행정시스템의 무력화, 나아가 부패와 타락을 부를 수 있다.

조선은 신권(臣權)이 발달한 왕조였다. 따라서 대내의 환관들이 득세할 기회는 중국에 비해 상대적으로 적었다. 그러나 요즘 한국 정치에서는 ‘대내의 정치’가 늘 걱정이다.

전임 노무현 정권 때 청와대가 각종 정책에 무분별하게 간여하면서 국정 혼란을 빚은 기억이 아직 생생하다. 청와대 비서실 규모를 축소하면서 출범한 현 정권이지만 행태는 전 정권을 닮아가서 걱정이다. 담당 부처와 제대로 된 협의도 없이 불쑥 교육정책에 대해 떠든 미래기획위원회 위원장이라는 사람을 보면 특히 그렇다.

‘왕의 남자’라고 해서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착각이다. 대통령 측근은 정책의 조율과 자문에 충실할 일이다. 권력의 맛에 취해 엄연한 직분을 넘어서면 곤란하다.

유광종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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