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영빈 칼럼]한나라당 정신차려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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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모두가 맥을 놓은 채 한숨 쉬고 불안해 할 뿐이다.

세상이 어려울수록 제자리에서 제 역할을 두배 이상 충실히 해야 난국을 뚫고 나갈 수 있을 텐데 모두가 깊은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일손을 놓고 있다.

그중 어제의 여당이었고 오늘의 야당이 된 한나라당이 대표적 사례다.

대통령선거 투표 당일 나는 평양에 있었다.

귀중한 한표의 주권을 행사하지 못한 채 우리 일행 5명은 북한 문화재 조사를 위해 지난해 12월15일 서울을 떠나 13일간을 북한땅에 머물렀다.

본의 아니게 투표 기권자가 돼버렸다.

나는 대선 전 3金시대 청산과 내각제 반대를 주장한 글을 쓴 바 있다.

한표를 찍지는 못했지만 한나라당과 비슷한 정치개혁 노선을 주장한 셈이어서 대선 패배에 연민의 정을 보내는 많은 사람 중 한 사람일 수 있다.

그러나 대선 이후 거대야당으로서 한나라당이 보이는 무책 (無策) 과 무정견은 그동안 그들을 지지했을 많은 사람들에게 실망감 내지 깊은 허탈감을 안겨주고 있다.

비록 대선에선 패배했지만 아직도 한나라당은 1백60여명의 국회의원이 모인 최대정당이다.

선거 때 집권만 하면 경제위기를 탈출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수없이 외쳤던 당사자들이다.

어째서 이들은 지금 말이 없는가.

만약 한나라당이 집권했다면 어떤 대책을 내놓을 수 있었을지 의심조차 들 정도로 한나라당은 꿀먹은 벙어리다.

물론 선거 패배의 충격도 있고 재충전의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급박하다.

20여일이 지났는데도 제 기능을 못한다면 이는 중대한 직무유기다.

지금 김대중 (金大中) 대통령당선자는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 선전분투하고 있다.

개혁 의지도 높고 잘하고 있다는 평가도 넓게 받고 있다.

여기에 동서화합의 단합도 이뤄질 전망이다.

구시대 정치의 잔재를 DJ 스스로 앞장서 혁파하겠다는 강한 의지와 대안도 제시하고 있다.

이런 노력이 성과를 거둔다면 야당이 설 자리는 더욱 좁아진다.

더구나 새 정부가 들어서면 곧바로 5월 지방선거에 들어간다.

국민의 고통과 나라 경제 위기 극복에 아무런 기여도 못한 정당이 지방선거에서 무슨 염치로 표를 모으고 지지를 호소할 것인가.

들리는 말로는 3월중 경선을 통해 지도부를 새롭게 구성한다고 한다.

한번 경선으로 피를 봤으면 됐지 무엇이 모자라 이 시기에 분열과 혼란을 자초할 경선까지 벌이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중심을 잡고 결속을 다짐해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인데 계파간, 파벌간 저질분쟁만 노출시킬 경선이라면 지금은 시기가 아니다.

특히 서울과 경기지역의 지방선거에서 참패할 경우 한나라당은 공중분해의 위기를 맞을지 모른다.

한 정당이 스스로 묘혈을 파 해체된다면 그것은 모두 정치권 자신들의 문제일 수 있다.

그러나 거대야당의 해체는 곧 내각제 등장이라는 중대한 정치적 문제와 연관돼 나라를 혼란에 빠뜨릴 위험을 안고 있기 때문에 걱정스러운 것이다.

한나라당이 거대야당으로서 제 역할을 바로 못하고 분해돼 군소정당으로 전락할 경우 내각제 개헌에 브레이크를 걸 장치가 없어진다.

DJP연합의 새 정부가 내세운 공약이 1년반 안에 경제위기를 극복하고 곧이어 내각제 개헌을 한다는 것이다. 국민 모두가 고통을 인내하고 새 정부의 개혁 의지가 무리없이 진행된다면 위기 극복은 가능하리란 기대와 희망을 갖는다.

그러나 곧이어 등장할 내각제 개헌 논의로 정치가 혼란에 빠지면서 경제는 뒷전이고 정치권은 세력 규합에 정신을 쏟게 돼 분열과 혼란이 가중될까 걱정이다.

결국 내각제라는 게 무엇인가.

책임정치라는 내각제 본래의 장점은 사라지고 자칫 정경유착과 패거리 정치가 되살아나는 3金 평생집권 보장체제가 우리식 내각제니 이런 위기현상을 막아야 한다는 게 한나라당의 줄기찬 주장이 아니었는가.

때문에 한나라당은 정신을 차려야 한다.

위기 극복의 대안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새 정부에 잘못된 정책이 있으면 비판을 가해야 한다.

이 성과를 가지고 당내 결속을 강화하면서 조기 지방선거 채비를 서두르는 것이 지금 한나라당이 해야 할 최선.최대의 과제일 것이다.

정치 혼란의 재현을 미연에 막기 위해서도 한나라당은 지금 당장 정신을 차려야 한다.

권영빈<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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