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110>리셴녠(李先念)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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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후베이성 당서기 겸 성정부 주석 시절 배를 타고 우한(武漢)을 순시하는 리셴녠. 김명호 제공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 이래 수많은 풍파가 있었다. 집권과 동시에 시작된 권력투쟁과 마오쩌둥(毛澤東)의 의심벽이 가장 큰 이유였다. 건국의 원훈들이 하루아침에 몰락하곤 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두 번 실각했고 저우언라이(周恩來)도 아슬아슬했던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홍군의 아버지 주더(朱德)의 입에서 “이게 어디 옛날에 한솥밥 먹은 사람들끼리 할 짓이냐”라는 탄식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리셴녠(李先念:1909∼1992)은 한 번도 실각한 적이 없고 문화혁명 시절에도 곤욕을 치르지 않았다. 31년간 정치국원을 연임하며 부총리 15년에다 국가주석과 전국정협 주석을 역임한 3조(三朝: 마오쩌둥·덩샤오핑·장쩌민 시대)의 원로였다.

리셴녠은 매사에 근엄하고 신중한 사람이었다. 겉으로 보기엔 아무런 힘이 없는 사람 같았지만 복잡한 환경이 빚어낸 아주 복잡한 인간 관계를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성장 과정에서 원인을 찾는다. 리의 모친은 전형적인 농촌 여성이었다. 후베이(湖北)성 황안(黃安)현의 빈농이던 세 번째 남편과의 사이에서 리셴녠을 낳았다. 나이가 많은 데다 영양실조였던 모친은 수유가 불가능했다. 큰누나의 젖을 조카와 함께 나눠먹으며 목숨을 유지했다. 아버지가 서로 다른 8명의 자녀들이 한 집안에 북적거리다 보니 억울한 일을 겪어도 남을 원망하지 않고, 관대하고 후덕하지 않으면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을 환경이었다. 불평은 하면 할수록 손해였다. 리는 인간이 하기에 가장 힘든 일을 어린 시절부터 당연한 것으로 여기며 자랐다. 학교라는 게 있다는 말은 들었지만 문턱에도 가보지 못했고 감히 갈 생각도 하지 않았다.

12살 때부터 목공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목수는 평생 굶어 죽을 염려가 없었다. 3년간 기술을 익힌 후 대패 하나를 달랑 들고 후베이 최대의 도시인 우한(武漢)으로 나와 관(棺)만 전문으로 짜는 집에 취직했다. 항구도시이다 보니 부두 노동자와 하층민들의 생활을 접할 기회가 많았다. 빈농보다 나을 게 없었다. 평생 가난에서 헤어날 가능성이라곤 손톱만큼도 없어 보였다. 하루는 거리에 나왔다가 북벌에 나선 국민혁명군의 대오와 마주쳤다. 그날 밤잠을 설쳤다. 죽은 사람들 뒤치다꺼리나 하는 자신의 처지가 한심했다. 둥비우(董必武)라는 사람이 고향에서 혁명의 진리를 선전하고 다닌다는 소문을 들었다.

리셴녠은 대패를 팽개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7세 때였다. 이듬해 겨울 공산당에 입당해 황안·마청(麻城)지구 농민폭동(黃麻起義)에 참여했다. 실패한 폭동이었다. 리는 유격대를 조직했다. 5년 후 300여 명의 청년을 이끌고 홍군에 가담해 구사회(舊社會)를 매장시킬 관을 본격적으로 짜기 시작했다. 35년 6월 마오쩌둥을 처음 만났다. 마오는 “헛소문이 아니었구나. 너야말로 소년영웅이다”라며 즐거워했다. 리는 그 후에도 계속 전쟁터에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지휘하던 30군이 홍군의 주력부대 중 하나로 성장하자 마오는 “우리는 전쟁이 뭔지를 몰랐던 사람들이다. 전쟁을 하면서 전쟁을 배웠다. 대표적인 사람이 리셴녠이다”라며 대견해했다. 리는 22년간 전장을 누비며 혁명 근거지를 건설했다. 전쟁에 승리하는 것 못지않게 먹고 입는 것을 소중히 여긴 지휘관이었다.

49년 초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되자 당 중앙은 중요 지역의 책임자를 물색하기 시작했다. 당내에 후베이 출신들이 많았지만 마오쩌둥은 후베이성 당서기 겸 성정부 주석에 리셴녠을 낙점하며 군구사령관과 정치위원을 겸하게 했다. 리는 5년간 후베이의 자본가들과 전쟁을 치러야 했다. 화약 냄새만 없을 뿐 눈에서 피가 튀어나올 것 같은 전쟁이었다. 전국의 재정과 경제를 주관하던 부총리 천윈(陳雲)과 재정부장 덩샤오핑이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리셴녠을 신임 재정부장에 천거했다. 나이가 젊고 두뇌가 명석해 한번 본 경제수치들을 자유자재로 기억해 활용하고 늘 배우기를 좋아한다는 것이 추천 이유였다. 마오는 무조건 동의했지만 리는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며 재고를 요청했다. 마오가 직접 나섰다. “네가 할 수 없고 할 생각이 없다면 국민당 재정부장이었던 쑹쯔원(宋子文)을 대만에서 모셔오는 수밖에 없다. 전쟁처럼 배우면서 해라.”

60년 쿠바의 중앙은행장 체 게바라가 중국을 방문했다. 마오쩌둥은 “혁명에 승리할 무렵 재정을 아는 사람이 전무했다. 간부를 배양했지만 시간이 갈수록 쓸모가 없었다. 우리는 대병력을 장악해 본 적이 있는 사람에게 전국의 재정을 관장하게 했다. 이 방법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한 사람이다”라며 재정부장 리셴녠을 게바라에게 직접 소개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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