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강민석 칼럼

‘켄터키 할아버지’가 커 보이는 이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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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2년 전, 정치부 초년생 시절의 일이다. 자민련을 담당하게 된 기자는 출입 첫날 김종필(JP) 총재와 우연히 점심을 같이 먹게 됐다. 선배 기자와 총재실에 신입인사를 하러 들렀더니 JP가 특유의 저음으로 권했다.

“어때요, 소찬(小餐)이라도 여기서 같이 드십시다.”
그때 배달된 메뉴가 조금 의외였다. 젊은이들이나 먹는 줄 알았던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KFC)이 총재실 탁자에 올라왔다.

당시 71세이던 JP가 치킨을 맛나게 먹던 모습이 선하다. 사실 기자는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을 그때 처음 먹어봤다.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맛을 안다지만, 진정한 맛을 알게 된 건 그로부터 10년이 더 지나서였다.

작년 미국 연수 중 노스캐롤라이나의 주도 랄리에 있는 치킨집에 들어간 적이 있다. 음식점 벽에는 콧수염에 나비넥타이가 상징인 KFC 창업자 ‘커넬 샌더스’의 빛바랜 사진이 걸려 있었다. 그 사진 밑엔 이런 글귀가 한 줄 적혀있었다.

“He never retired, he started his business when he was 75-year-old.”
(그는 절대 은퇴하지 않는다. 그는 75세에 그의 사업을 시작했다.)

75란 숫자에 요즘 말로 ‘필이 꽂혀’ 그 문장을 읽고 또 읽었다. 세계 80여 개국에 진출한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한 때가 인생의 황혼기였다는 데 놀랐다(나중에 알아보니 그가 KFC프랜차이즈를 시작한 나이는 65세. 75세엔 경영권을 200만 달러에 넘기고 관련된 새로운 일을 시작할 때였다).

65세 이전까진 그럼 도대체 뭘 하고 살았을까. 창업 직전 64세의 커넬 샌더스는 만신창이였다. 사업은 계속 망했고, 아들은 죽었고, 그 충격으로 정신병을 앓았으며, 아내는 그의 곁을 떠났다. 수중에 남은 돈은 달랑 105달러의 사회보장연금뿐. 모든 불행과 절망이 그의 곁에 있었다. 하지만 그는 “통닭을 맛있게 튀기는 법을 팔아 로열티를 받자”고 결심한다.

당시엔 프랜차이즈란 개념도 없을 때였다. 레스토랑 주인들은 지지리도 못살고, 운도 없고, 나이 많은 노인의 제안에 다들 냉소했다. 그래도 그는 레스토랑 문을 계속 두드려 나갔다. 무려 1009번을 거절당하면서 말이다. 그것은 거의 몸부림이었다.

1010번째 도전에서 그는 닭고기 한 조각당 4센트를 주겠다는 사람을 만날 수 있었다. 65세까지 꾸었던 악몽이 꿈으로 바뀌어, 빈털터리 노인은 거부가 됐다.

커넬 샌더스 신화는 여러모로 우리의 그것과는 다르다. 한국은 ‘초스피드’가 자랑인 나라다.

20대에 이사가 되고, 30대에 사장을 한 ‘이명박 고속성장 신화’는 그를 대통령으로까지 만들었다(요즘 정부의 슬로건도 속도전이다).

기자에게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 맛을 알게 해준 JP도 그렇게 고속 성장한 사람 중 한 명이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하고 집권 세력 2인자에 올랐을 때가 30대 초반이었다. 불과 몇 년 만에 커다란 회사를 키웠다는 20~30대 벤처기업가들의 현기증 나는 스토리도 넘친다.

세상도 그들을 닮으려고 난리다. 어떤 시험이든 최연소 합격자의 성공담이 각광 받는다. 학교에선 조기(早期)에 뭐라도 가르치려고 야단이다. 부모들은 어린 자녀들에게 “뒤처지지 말아야 한다”고 주입한다. 요즘 국회의원들은 어떻게든 10년만 버티면 벌써 대권주자급이다. 2007년 대선 때 범여권 대선예비후보는 스무 명이 넘었는데, 태반이 초재선 의원들이었다.

단계를 뛰어넘어 ‘빨리’ ‘일찍’ 성공해야 존경 받는 한국에서 느린 사람들은 마치 죄짓는 기분으로 살아야 한다. 최근 만난 한 공무원은 한국 사회가 점점 ‘일몰제(日沒制)’의 함정에 빠진 것 같다고 지적했다.

“5년 만에 정권도 바뀌고, 사회와 문화는 그보다 더 빨리 변하니 다들 급해진 것 같다. 박연차 회장에게 ‘연차수당’을 받은 사람들도 결국 해가 저물어 다 사라지기 전에 한 건 빨리 챙기려 한 게 아닐까.”

이런 사회는 빨리 늙을 수밖에 없다. 조로한 사회일수록 ‘고개 숙인 남자’들이 넘쳐날 것이다. 세계가 뛸 땐 한국도 뛰어야 한다. 그러나 무작정 빨리 뛴다고 빨리 목표에 다가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 사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불황기에 “이 나이까지 내가 뭘 했을까”하는 생각에 초조하신 분들, 인생 이모작 시대를 걱정하는 분들은 한번쯤 커넬 샌더스와 자신을 비교해보는 건 어떨까. 내가 65세보다 나이가 많은지. 만약 그보다 나이가 많은 분이라면 수중에 105달러밖에 없는지. 가진 것도 그보다 적다면 1009번을 거절당한 적이 있는지 말이다.

사회탐사부문 차장 msk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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