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불빛이라도, 어두운 숲에선 포기할 수 없는 법

중앙선데이

입력

지면보기

111호 13면

1997년 PC통신 하이텔 ‘무림동’에 최후식이라는 작가가『표류공주』(漂流空舟·정처 없이 떠도는 빈 배)라는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조회수 100만을 기록하며 3년간 연재된 글은 2000년 네 권으로 묶여 출간된다. 대본소가 아닌 일반 서점을 대상으로 시공사가 펴낸 첫 무협소설이다.책 날개에 붙은 선전 문구가 엄청나다. ‘장르가 지니고 있는 미덕을 놀라운 창작력으로 소화해내며 문학의 궁극에 도달한 기념비적 작품’.

조현욱 교수의 장르문학 산책- 최후식의 『표류공주』

당시 필자는 엉뚱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뭐, 문학의 궁극에 도달해? 무협소설에 매길 평가가 아니지 않은가.필자는 이틀 밤을 새워야 했다. 작고한 문학평론가 김현이 썼던 그대로다. “무협소설을 읽는다는 것은 체력과의 투쟁이다.”

모두 읽고 나자 어째서 ‘문학’ 운운하는 문구를 썼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이 책은 사랑과 구원의 가능성(혹은 불가능성)에 대한 모색이자 성찰이다. 우리는 사랑과 구원을 원한다. 하지만 현실은 이를 실현하지 못하게 하는 수많은 장애로 가득 차 있다. 이루어지지 않는 삶, 도달할 수 없는 사랑, 보답받지 못하는 고통….

그러나 어두운 숲 속을 헤매는 인간은 먼 곳에서 깜박거리는 희미한 불빛을 포기하지 못하는 법이다. 『표류공주』는 사랑과 구원의 불빛에 대한 이야기이자, 그곳에 도달하지 못하게 하는 현실에 대한 고발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 흘려 부딪칠 수 밖에 없는 인간에 대한 탄식이다. 처절한 집념과 희생이 좌절로 끝나기 때문에 비극이며, 그 내용이 상징적이기 때문에 신화성을 띤다.

이 책은 무협소설의 외피를 갖고 있다. 무술을 사용하는 강호의 세계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장르의 암묵적 규약은 대부분 파괴된다. 장르소설 독자는 ‘이런 것을 읽고 싶다’는 기대를 가지고 책을 선택하게 마련이다. 서사적으로는 원수를 무찌르고 강호를 질타하는 속 시원함, 구조적으로는 고난과 방황을 극복하고 혼자 힘으로 우뚝 서는 성장소설이 기대의 핵심이다. 그러나 『표류공주』의 주인공은 끝까지 비참한 신세이고 사랑도 이루어지지 못한다. 일 년에 하루, 해와 달이 동시에 뜨는 장면을 보기 위해 해마다 항주로 가는 두 사람은 언제나 각각 다른 장소에 있게 된다.

독자들의 평가는 극명하게 갈린다. ‘뭐 이런 답답하고 황당한 무협이 있는가’라는 폄하와 ‘무협에 문학이 있다면 바로 이런 작품’이라는 찬사다. 서울대 중문과 전형준 교수는 찬사 쪽에 선다. “주인공의 세계는 의미가 실현되지 않는, 비극적인 부조리의 세계다. 『표류공주』는 마치 독자에게 실존적 불안을 감염시키기 위해 쓰인 것처럼 보이는데 이쯤 되면 이 작품은 이미 김현의 의미에서 예술과 만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무협과 문학을 동시에 사랑하는 독자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작품이라는 게 필자의 평가다. 책은 절판됐고, 대본소나 인터넷상에서 구해 볼 수밖에 없다.


조현욱 한국외국어대 언론정보학부 초빙교수. 중앙일보에서 문화부장과 문화담당 논설위원을 지냈다. 무협소설과 SF 같은 장르문학을 좋아한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