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8세계의 조류]1.나락의 아시아(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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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98년 세계는 과연 어떤 모습을 보일 것인가.

'21세기는 태평양시대' 란 아시아의 장밋빛 꿈이 금융위기로 근저 (根底) 부터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냉전이후 초패권국이 된 미국의 지위는 더욱 공고해질 전망이다.

금세기 후반들어 쇠퇴의 길을 걸어온 유럽은 새로운 기회를 맞을 것이다.

재편되는 국제질서는 또 주변세력이었던 러시아를 비롯한 옛동구권.이슬람권.중남미 국가에 위기이자 동시에 기회로 작용할 것이 분명하다.

세기말의 새로운 국제조류를 8회에 걸친 시리즈로 점검해 본다.

<게재 순서>

①奈落의 아시아

②超패권국 미국

③유럽의 新르네상스

④러.東歐시장경제의 장래

⑤이슬람의 결속

⑥중남미의 부상

⑦아프리카의 암흑

⑧아시아 위기와 중국

지난해 12월15일 열린 동남아국가연합 (ASEAN) 비공식 확대정상회담은 당초 축제의 한마당으로 꾸며질 예정이었다.

고도성장을 든든한 배경으로 삼아 '지구촌의 엔진' 역할을 자임하게 된 ASEAN 9개국은 몇 걸음 앞서간 일본.한국과 강대국 중국의 축복을 받으며 마하티르 모하마드 말레이시아총리의 '비전 (Vision) 2020' 구상을 느긋하게 경청할 작정이었다.

97년 상반기만 해도 이같은 장밋빛 전망은 유효했다.

그러나 7월 태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순식간에 아시아 전역으로 번지면서 정상회담장은 한탄과 자책, 선진국에 대한 비난과 지원요청이 뒤섞인 '넋두리 마당' 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선진국, 특히 미국을 강도높게 비난해온 마하티르 총리조차 "아시아의 금융위기에는 아시아인들의 책임이 더 크다" 며 허리를 낮췄다.

불과 1개월 전 "서방의 환투기꾼들이 아시아에서만 2천억달러를 빼갔다" 며 서방자본을 신랄히 비난하던 것과는 1백80도 달라진 모습이다.

때맞춰 미국.유럽 같은 선진국그룹에서는 '수십년의 성장신화는 끝났다' '일본모델은 실패했다' 는 아시아 성장한계론이 다시 득세하기 시작했다.

경제위기는 자연스레 정치적 격변으로 연결됐다.

태국은 이미 정권이 바뀌었고 한국도 금융위기가 정권교체의 주요인으로 꼽힌다.

기초체력이 탄탄하다는 일본경제마저 뚜렷한 동요 기미를 보이는 바람에 하시모토 류타로 (橋本龍太郎) 정권의 인기는 바닥을 더듬고 있는 형편이다.

인도네시아의 산불로 부근 동남아국가가 자욱하게 연기로 뒤덮인 모습은 '나락 (奈落)에 갇힌 아시아' 를 극명하게 상징하는 장면으로 자주 인용되고 있다.

문제는 아시아의 '거품 끝, 고통 시작' 단계가 올해 더욱 본격화하리라는 점이다.

일본 외무성이 지난해말 내놓은 연례 국제정세 보고서는 한국.일본.ASEAN이 직면한 금융불안을 '일과성이 아닌 구조적인 문제' 라고 진단했다.

보고서는 이어 '98년에도 계속될 경제위기는 역내 정치적 안정에 마이너스 요인으로 작용할 것' 이라고 예상했다.

단적인 예로 금융위기를 막느라 정신이 없는 한국이 미.중.일.러 등 주변 4강과의 협조체제를 마음껏 활용해 남북관계를 주도할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상당수 아시아국가는 민족.영토분쟁의 불씨를 안고 있으며 인권탄압 시비도 끊이지 않는다.

곧바로 지구온난화 방지협약의 무거운 짐도 이 지역 국가들을 덮칠 것이다.

적지 않은 전문가들은 그러나 풍부하고 질 높은 노동력과 높은 저축률을 자랑하는 아시아국가들이 수년간의 조정기를 성공적으로 거칠 경우 다시 성장세를 회복할 것으로 보고 있다.

와타나베 도시오 (渡邊利夫) 도쿄공업대 경제학과 교수는 "아시아 비관론은 이번에 처음 등장한 것이 아니다" 며 "현재의 통화위기를 구조적 모순 탓으로 보는 것은 잘못" 이라고 단언한다.

프레드 버그스텐 미국국제경제연구소장도 "앞으로 20~30년간 아시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성장할 것" 이라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금융부문의 글로벌화가 첫번째 과제라는 것이 이들 석학의 공통된 지적이다.

정치.군사적 안정뿐만 아니라 경제적 협력을 위해서도 역내 다자간 (多者間) 기구를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생존을 위한 협력' 은 미상불 과장된 수사가 아닌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이념과 입장의 차이를 넘어 '적과의 동침' 도 감내해야 하는 혹독한 현실 속에 아시아는 던져진 셈이다.

도쿄 = 노재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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