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포럼]국가흥망 가를 1998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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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1998년은 우리 운명을 판가름하는 역사의 결정적 단계가 된다.

국제통화기금 (IMF) 졸업 여부가 21세기 한국의 흥망 (興亡) 을 결정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한강의 기적' 이라던 우리 경제는 작동이 중단됐고, IMF 구제금융에 간신히 명줄만 유지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한국형 개발독재 발전모델이 임종상태에 있음을 말한다.

낡은 한국모델에 대한 미련을 버리고 새 경제모델을 향해 신속히 구조조정을 할 때가 왔다.

IMF협약은 선진자본주의의 기준에 따라 구조변혁을 해야 살아남는다는 최후통첩이나 다름없다.

우리는 대통령선거에서 세계자본주의의 한 축인 민주주의의 성숙한 능력을 국제사회에 과시했다.

이번에 여야 정권교체에 성공한 것은 IMF협약에 따른 구조조정작업과 국제지원을 얻는 데 힘을 실어 줄 것이라는 관측이 많다.

'김대중 (金大中) 씨의 집권은 한국 민주주의의 발전을 증명했으며, 그는 권력에서 소외당한 중산층.서민의 지지로부터 나온 최초의 정치지도자' 라고 르몽드지는 호평했다.

그가 정경유착.관치금융.차입경영 등의 과두지배에서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병든 정치.사회.경제구조를 해부.수술할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경제는 국제정세와 세계자본주의의 본질에 둔감했다.

이러한 무지 속에 세계경영에 나섰다가 세계자본주의의 집중공격을 받게 된 것이다.

세계자본주의는 수세기간 방해되는 모든 걸림돌을 분쇄하면서 발전해 왔다.

1871년 프랑스 자본가들은 최초의 공산혁명인 파리 코뮌을 독일군대까지 동원해 파멸시켰다.

1929년 대공황시 독일과 이탈리아는 자본주의를 유지하기 위해 민주주의를 포기했고, 1973년 칠레의 좌익 아옌데 정부는 쿠데타로 전복됐다.

자본주의는 40여년간의 냉전 끝에 거대한 공산진영까지 몰락시켰다.

8년전 베를린장벽 붕괴는 자본주의의 세계화라는 폭풍을 일으켰다.

이것은 옛 소련을 포함한 공산진영을 병합했다.

이때 한국은 세계화에 동참했다.

그러나 개발독재형 모델을 국제무대에 이식한 모험이 문제였다.

한국의 금융기관과 대기업은 국내의 차입경영방식을 구미 (歐美) 선진권에서 그대로 답습했다.

정부는 이를 방치했다.

한국경제는 외국 금융기관으로부터의 무절제한 차입으로 수많은 사업을 세계 도처에 벌이면서 선진기업을 매수했다.

상환에 대비하지 않은 장님경영이었던 셈이다.

정부도 유럽연합 (EU) 이 10억달러 지원을 고민할 때 옛 소련 등 공산권에 겁 없이 40여억달러를 원조하는 등 허세를 부렸다.

외교공관과 대사.공사관저 및 해외공보관 저택까지 구입하는가 하면 유엔비상임이사국 등 국제기구의 지도적 지위를 차지했다.

1년 전에는 경제협력개발기구 (OECD)에 가입해 선진국임을 자처했다.

YS정부는 외유때마다 경제지원을 약속하는가 하면, '21세기초 영국을 제치고 G7이 된다' 는 등 장밋빛 꿈을 선전했다.

모두 분수 넘치는 허세였다.

한국경제가 IMF 구제금융을 받고도 단기외채의 상환기간을 연기받지 못하면 국가부도를 면하기 어려운 위기의 연속이 1998년초의 현주소다.

그러나 우리는 좌절할 수 없다.

IMF협약을 이행해 낡은 경제구조를 선진형으로 전환하면 재기 (再起) 의 기회가 올 수 있다.

정부.금융.기업의 구조조정을 신속히 집행한다면 선진국들은 도울 것이 확실하다.

다만 실업문제는 2차 세계대전후 폐허에서 드골과 아데나워가 했듯 복지제도를 도입해 사회안정을 도모해 나가는 것이 바람직하다.

총외채 1천5백30억달러중 올해 갚아야 할 단기외채가 9백22억달러에 이른다고 한다.

그래서 국민 모두가 허리띠를 단단히 졸라 매고 단결해야 하며, 새 정부는 과거를 교훈 삼아 구조조정작업을 가속해 국제사회의 공신력을 확보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몰락한 공산권과는 다르기 때문에 우리의 지금 형편을 북한 붕괴에 비유하는 것은 가당찮은 말이다.

우리에게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단단한 인프라와 강력한 개척의지가 있지 않은가.

이러한 자산을 기초로 구질서에서 새 질서로 전환하는 결정적인 한 해가 1998년이다.

그리고 세계자본주의는 빚 때문에 민주국가를 붕괴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그래서 새해는 희망의 새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주섭일<국제문제대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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