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년 미군정 슬기롭게 넘긴 일본의 전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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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8면

대량실업과 연쇄도산이라는 암울한 국제통화기금 (IMF) 지배체제시대가 개막되지만 받아들이기에 따라 보약 (補藥) 이 될 수도 있다.

지난 45년부터 시작된 연합국군총사령부 (GHQ) 와 요시다 시게루 (吉田茂) 총리와의 길고 긴 줄다리기라는 일본의 경험은 이런 점에서 한국에 적지않은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요시다 내각은 국민의 반발을 무릅쓰고 어찌 보면 굴욕적이기도 한 GHQ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면서 기적적으로 전후 부흥을 이끌어 낸 것이다.

일본에 진주한 GHQ는 정치개혁과 함께 경제분야에서도 세가지 주문을 내놓았다.

재벌 해체와 농지개혁.노동개혁이 그것이다.

맥아더 사령관은 "일본의 군국주의적 충동을 억제하기 위해서는 '경제민주화' 가 무엇보다 중요하다" 고 말했다.

재벌 해체를 통해 기업간 경쟁을 유도하고, 자작농 육성과 직업안정법 제정을 통해 국내 소비시장을 확충시킨다는 것이 GHQ의 전략이었다.

농지개혁 결과 기생지주제가 사라지면서 54% (45년) 였던 일본의 자작농 비율은 90% (50년) 로 늘어났다.

그러나 무엇보다 GHQ가 강력하게 밀어붙인 것이 재벌 해체조치. 11개의 대기업이 해체.분할되고, 히타치제작소 등 7개사는 공장 및 주식처분 명령을 받았다.

광산업의 미쓰이 (三井) , 기계공업의 미쓰비시 (三菱) , 중공업의 스미토모 (住友) , 금융업의 야스다 (安田) 등 4대 재벌이 집중적인 견제를 받았다.

46년 총리에 취임한 요시다는 국민들에게 "패배한 것처럼 잘 행동하자" 고 호소했다.

GHQ가 제시한 방향이 어차피 국제적인 흐름인 만큼 이를 받아들이고 납작 엎드려 지내면서 경제를 일으키자는 전략이었다.

요시다 총리는 다른 한편으로 47년 경사 (傾斜) 생산방식을 실시했다.

한정된 자원을 석탄.철강업 등에 집중투자해 붕괴된 생산기반을 조속히 확충하기 위한 조치였다.

그 결과 엄청난 인플레가 발생했다.

GHQ가 다급하게 불러들인 인물이 디트로이트은행 총재였던 J 도지. 요시다는 ▶균형예산▶비경제분야에 대출억제▶세금추징 강화 등 도지 총재가 제안한 경제안정 9원칙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달러당 3백60엔의 고정환율 제도를 도입하라는 도지의 제안도 곧바로 수용했다.

도지 총재는 "일본은 죽마 (竹馬) 를 타고 있다.

한쪽 발은 미국의 원조, 또 한쪽은 국내 보조금에 기생하고 있다.

어느 한쪽이 무너져도 파산을 피할수 없다.

고통이 따르더라도 스스로 땅을 딛고 걸을 수밖에 없다" 고 충고했다.

요시다 내각이 GHQ의 지시를 실행하는 데는 물론 엄청난 혼란이 뒤따랐다.

45년 가을에는 실업자가 1천4백만명에 달했고 경사생산방식에 따른 인플레로 47년에는 공무원까지 포함해 모든 근로자가 참가한 2.1총파업의 시련을 겪기도 했다.

요시다 총리의 별명은 원맨 (One Man) .혼란 속에서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하기 위해 독선적으로 행동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53년 그는 국회에서 "바카야로 (바보 멍청이)" 라고 욕설을 퍼붓는 바람에 국회가 해산되기까지 했다.

55년 12월 당내 권력투쟁에 밀려 요시다는 지지자 하나 없는 외톨이로 쓸쓸히 총리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일본정부는 그 다음해인 56년 경제백서를 통해 "더이상 전후 (戰後)가 아니다" 고 밝혔다.

일본경제가 패전을 딛고 GHQ의 예상보다 5년이나 앞서 선진국 대열에 다시 접어들었음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GHQ의 명령으로 해체됐던 재벌들도 새로운 경제환경에 따라 6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재결합에 나섰고, 97년에는 독점금지법까지 개정돼 재벌의 상징이던 지주회사가 부활됐다.

총리 퇴임후 비난 일색이던 국내 여론도 요시다의 정책을 재평가하기 시작했다.

67년 요시다가 운명했을 때 일본 국민들은 그의 장례식을 일왕과 같은 수준인 국장 (國葬) 으로 치러주었다.

도쿄 = 이철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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