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론]'투명성' 부족 이젠 고쳐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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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6면

요즘의 상황이 모든 국민에게 극심한 좌절과 실망을 안겨주고 있다.

그 동안 우리가 자랑스러워했던 '초고속 성장' 의 신화가 정말 이렇게 허망한 것이었던가.

고비용 저효율이라는 우리 경제의 구조적 취약점과 맹목적인 성장 추구가 경제 붕괴의 주범이라면 증세가 이토록 심화돼 쓰러지기 직전까지도 자각하지 못하게 한 '투명성 부족' 이 공범으로서의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이것은 자각증세를 방해했음은 물론 장기적으로 외국 금융기관과 투자가들이 가지고 있던 우리 경제에 대한 신뢰성을 빼앗아갔으며 지금에 와서는 우리끼리도 기업과 금융기관과 정부가 서로를 불신하는데 몫을 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공인회계사의 한 사람으로 크나큰 자괴감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이번 국제통화기금 (IMF) 과의 협정문에는 우리 기업의 회계자료에 대한 불신이 여러 곳에 비치고 있다.

'회계기준과 공시에 관한 규정도 국제기준에 따라 강화돼야 한다' 는 조항은 아주 평범해 보이지만 제법 망신스러울 뿐 아니라 대단히 큰 변화를 의미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반발하고 흥분하기에 앞서 차분히 우리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기업의 재무제표와 감사보고의 신뢰성에 대해 간간이 문제가 제기돼 왔고 공인회계사는 물론 관련 기관들이 힘을 합쳐 이를 향상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 왔다.

그러나 아직도 국제적으로 요구되는 수준의 투명성까지엔 적지 않은 차이가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차이는 기업체 관계자의 회계능력 부족이나 우리 공인회계사들의 감사실력 부족에 기인하기보다 오히려 사회구조.의식구조와 더 깊이 관계돼 있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치부를 드러내 고치고 해결하려 하기보다 감춰두고 대충 넘어가려는 우리의 의식구조와 이것이 어느 정도 용인되는 사회구조가 바로 그것이다.

어느 은행의 부실채권이 얼마 정도라고 신문에 공공연히 보도되면서도 그것이 막상 재무제표상에 적절히 표시되지 않은 채 사회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이 한 예다.

또 우리의 회계기준이 어느 부분에서는 선택의 폭과 자의성을 다소 넓게 인정해 왔던 것도 사실이다.

여기에 덧붙여 우리의 금융관행과 세무관행도 기업의 정상적인 재무표시를 가로막는 원인으로 지적돼 왔다.

중소기업이 한해만 적자가 나도 은행이 대출금을 회수하려 하거나 적자가 나서 세금을 안내면 세무조사를 받게 될 것이 두려워 억지로 이익을 만들고 세금을 납부하는 기업이 많았던 현실을 부정할 수 없다.

이런 구조와 관행 속에서 우리에게 편한 우리식의 투명성에 만족해 왔으며 여기에 비친 우리 모습에 나르시스처럼 도취돼 있다가 이 지경까지 이른 것이다.

위험관리조차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채 호미로 막을 수 있던 것을 가래로도 못 막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우리 경제의 부분적 투명성 부족이 전체에 대한 불신으로 확대 해석돼 국가전체에 대한 신용도가 떨어지는 현실은 더더욱 안타깝다.

투명성이란 우리에겐 일시적으로 큰 고통일 수 있다.

잘못된 점을 드러내는 부끄러움이며, 때로는 그 자체가 위험 (risk) 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될 명제다.

IMF의 요구가 지나치고 억울하며 모욕적이라고 분개하기는 쉽다.

우리나라의 회계기준과 공인회계사의 수준을 얕보는 거냐고 반발하기도 쉽다.

그러나 정말 어려운 것은 우리의 잘못된 과거의 관행 (알고 있었든 혹은 모르고 있었든 아니면 알면서도 모른 체했든) 을 인정하고 고치는 것이다. 당장의 위기를 넘기기 위해서가 아니라 앞으로 다시는 이런 치욕을 당하지 않고 진실로 선진된 경제 구조의 틀을 새롭게 짜나가기 위해 필요한 수준의 투명성은 반드시 확보돼야 한다.

그래서 그 투명성이 투자자를 비롯한 이해 관계자를 보호하고 위험관리를 가능케 해야 기업 자체를 보호하고 나아가 정부정책의 투명성과 맞물려 건강한 경제를 보장하게 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해외신인도는 걱정할 필요조차 없어질 것이다.

양승우 <안진회계법인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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