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사독재' 라는 말은 이제 거의 사어 (死語)가 되다시피 했지만 국민들의 눈과 귀와 입에서 차꼬가 풀린 것이 그처럼 아득한 옛일은 아니다.
지금도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 시절의 상흔 (傷痕) 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꽤 된다.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덜떨어진 인간들도 있다던가.
그리스의 미카엘 카코야니스감독의 86년 작품 '스위트 컨트리' (Sweet Country) 는 73년 칠레에서 일어난 군사쿤테타를 다루고 있다.
갓 태어난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가 군부에 의해 접수되는 시기의 일을 다룬 것이다.
영화는 쿠데타가 일어난 73년과 주인공들이 그 때를 회상하는 86년의 시점을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외형적인 스토리는 아옌데 대통령 부인의 여비서인 에바가 쿠테타 직후 체포돼 곤경을 당한 뒤 국외로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을 긴박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쿠테타가 일어난 지 10여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당시를 얘기하는 감독의 의도는 좀 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그같은 절박하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날 것 그대로 표출되는 인간성에 내재한 악이나 마성 (魔性) 을 보여주고자 한다.
여성들을 나체로 만들어 운동장에 모아놓고 학대하는 쿠테타군 장교의 사디즘, 무력과 계략을 통해 한 여성에 대한 애정을 손에 넣으려는 병사의 우둔함은 하루아침에 권력을 쥐게 된 이들이 그 권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낼 수 밖에 없었던, 이성 뒤에 가려진 인간의 추악한 모습들이다.
또 같은 인권단체에서 일하던 남자를 10여년간이나 첩자라고 오해하고 남편마저 불신해 왔던 미국인 중년여인의 회한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오류투성이의 동물에 지나지 않는 지를 묻고 있다.
인간정신에 대한 이같은 깊이있는 관찰들이 이 영화를 '살바도르' 나 '로메로' '언더 화이어' 같은 남미의 정치상황을 그린 '미국식 정치영화' 의 일차원성과 단견을 넘어서게 한다.
이것은 또 후에 프랑스로 귀화하긴 했지만 같은 그리스 출신감독인 코스타가브라스의 '제트' (69년) 나 '의문의 실종' (82년) 같은 작품과도 다른 격을 느끼게 한다.
27년생인 미카엘 카코야니스감독은 '스텔라' (55년) '엘렉트라' (61년) '그리스인 조르바' (64년) 로 일찌기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안개 속의 풍경' '율리시즈의 시선' 으로 저명한 앙겔로풀로스감독 (35년생) 이 70, 80년대에 이름을 날린데 비하면 그보다 먼저 그리스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 셈이다.
영국에서 연극수업을 한 그는 고대신화를 원용해 인간정신에 내재한 영원한 갈등을 포착하는데 능하다고 평가받아왔고 그래서 그를 '그리스 영화의 시인' 으로 부르기도 한다.
코스타가브라스는 물론이고 카코야니스나 앙겔로풀로스가 군사독재 문제를 영화에 자주 거론하는 것은 67~74년까지 군부가 집권한 그리스의 현대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스위트 컨트리' 는 그동안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을 꾸준히 내왔고 최근엔 켄 로치의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를 소개하기도 했던 성 베네딕트 시청각 종교교육 연구회에서 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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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기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