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코야니스 감독 86년작 영화 '스위스 컨트리'…인간의 추악한 마성 폭로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43면

'군사독재' 라는 말은 이제 거의 사어 (死語)가 되다시피 했지만 국민들의 눈과 귀와 입에서 차꼬가 풀린 것이 그처럼 아득한 옛일은 아니다.

지금도 정서적으로나 육체적으로 그 시절의 상흔 (傷痕) 을 안고 살아가는 이들은 꽤 된다.

그 시절을 그리워 하는 덜떨어진 인간들도 있다던가.

그리스의 미카엘 카코야니스감독의 86년 작품 '스위트 컨트리' (Sweet Country) 는 73년 칠레에서 일어난 군사쿤테타를 다루고 있다.

갓 태어난 아옌데의 사회주의 정부가 군부에 의해 접수되는 시기의 일을 다룬 것이다.

영화는 쿠데타가 일어난 73년과 주인공들이 그 때를 회상하는 86년의 시점을 교차하면서 진행된다.

외형적인 스토리는 아옌데 대통령 부인의 여비서인 에바가 쿠테타 직후 체포돼 곤경을 당한 뒤 국외로 탈출을 시도하는 과정을 긴박하게 그리고 있다.

하지만 쿠테타가 일어난 지 10여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당시를 얘기하는 감독의 의도는 좀 더 다른 데 있는 것 같다.

그같은 절박하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날 것 그대로 표출되는 인간성에 내재한 악이나 마성 (魔性) 을 보여주고자 한다.

여성들을 나체로 만들어 운동장에 모아놓고 학대하는 쿠테타군 장교의 사디즘, 무력과 계략을 통해 한 여성에 대한 애정을 손에 넣으려는 병사의 우둔함은 하루아침에 권력을 쥐게 된 이들이 그 권력을 주체하지 못하고 드러낼 수 밖에 없었던, 이성 뒤에 가려진 인간의 추악한 모습들이다.

또 같은 인권단체에서 일하던 남자를 10여년간이나 첩자라고 오해하고 남편마저 불신해 왔던 미국인 중년여인의 회한도 따지고 보면 인간이란 얼마나 오류투성이의 동물에 지나지 않는 지를 묻고 있다.

인간정신에 대한 이같은 깊이있는 관찰들이 이 영화를 '살바도르' 나 '로메로' '언더 화이어' 같은 남미의 정치상황을 그린 '미국식 정치영화' 의 일차원성과 단견을 넘어서게 한다.

이것은 또 후에 프랑스로 귀화하긴 했지만 같은 그리스 출신감독인 코스타가브라스의 '제트' (69년) 나 '의문의 실종' (82년) 같은 작품과도 다른 격을 느끼게 한다.

27년생인 미카엘 카코야니스감독은 '스텔라' (55년) '엘렉트라' (61년) '그리스인 조르바' (64년) 로 일찌기 국제적으로 주목을 받아왔다.

'안개 속의 풍경' '율리시즈의 시선' 으로 저명한 앙겔로풀로스감독 (35년생) 이 70, 80년대에 이름을 날린데 비하면 그보다 먼저 그리스 영화를 세계에 알리는 역할을 한 셈이다.

영국에서 연극수업을 한 그는 고대신화를 원용해 인간정신에 내재한 영원한 갈등을 포착하는데 능하다고 평가받아왔고 그래서 그를 '그리스 영화의 시인' 으로 부르기도 한다.

코스타가브라스는 물론이고 카코야니스나 앙겔로풀로스가 군사독재 문제를 영화에 자주 거론하는 것은 67~74년까지 군부가 집권한 그리스의 현대사와도 무관하지 않다.

'스위트 컨트리' 는 그동안 타르코프스키 감독의 작품을 꾸준히 내왔고 최근엔 켄 로치의 '레이디버드 레이디버드' 를 소개하기도 했던 성 베네딕트 시청각 종교교육 연구회에서 출시했다.

02 - 279 - 7429

이영기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