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핑·휴식의 공간 '삼성플라자' 문열어…'태평로 문화' 다시쓴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37면

인간의 삶은 공간에서 시작되고 공간에서 끝난다.

어머니의 자궁에서 시작되는 공간에 대한 지배욕은 허허벌판 세상에 던져지면서 무참하게 깨어진다.

아기의 첫 울음이란 바로 이같은 공간의 상실이 주는 아픔의 표시이기도 하다.

이후 삶의 치열함은 자신의 공간을 되찾기 위한 싸움이라고 봐야 한다.

토지와 주택에 대한 소유욕도 알고 보면 공간을 점령하기 위한 것이고 온갖 문화.예술행위도 속깊이 들여다보면 공간을 지배하기 위한 수단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급격한 도시화는 속좁은 사람들의 이같은 공간론을 더 이상 허락하지 않게 되었다.

어쩌면 더 큰 욕심이 배후에 도사리고 있는지 몰라도 모든 공간은 대중에게 개방되고 있다.

서울 남대문에서 시청에 이르는 태평로 한쪽에는 한때 잘 나가던 문화.상업공간이 있었다.

어느날 그 공간은 회색의 담장으로 가려졌다.

2년 가까이 베일에 싸여있던 이 공간이 늦가을 새로운 얼굴을 드러냈다.

삼성플라자 태평로점이다.

삼성물산이 유통업계에 뛰어들면서 두번째로 문을 연 이곳은 분명 쇼핑센터다.

그럼에도 그들은 이곳이 문화와 쇼핑이 복합된 '도심속의 오아시스' 라고 표현한다.

삼성생명빌딩과 삼성본관 그리고 그 옆의 태평로빌딩을 지상과 지하로 연결한 삼성플라자는 총면적 5천7백47평. 이 가운데 순수하게 매장으로 사용하는 3천5백평을 제외한 2천2백여 평이 문화.휴식공간이다.

삼 성플라자는 지상과 지하공간의 넉넉함을 보여주기 위해 '물' 을 상징적 개념으로 도입했다.

플로어를 따라 설치된 다양한 분수대와 폭포는 이를 구현한 것이다.

다른 한편 물은 생명의 근원이고 재화를 상징한다.

주역 팔괘에 따르면 물은 감괘 (坎卦) 로 젊음을 뜻한다.

이는 태평로 일대를 젊은이들의 공간으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다.

이제 그 가능성의 일단을 더듬어보자. 27일 오전 태평로 일대에 장구소리가 울려퍼지며 한무리의 여성들이 길놀이를 시작했다.

길가던 사람이 모여들고 지나가던 차들도 잠시 흐름을 멈췄다.

선거철의 때아닌 구경거리에 모두들 호기심을 가지고 이들을 지켜봤다.

플라자 개점을 기념한 삼성무용단의 공연이었다.

이들이 한바탕 굿을 벌인 곳은 이름부터가 '열린 광장' .누구든 지나다 여기서 펼쳐지는 공연이나 이벤트를 즐길 수 있게 공간은 활짝 열려 있다.

아마 대통령선거가 무르익으면 이곳도 한바탕 정치바람이 휩쓸고 지나가지 않을까 싶다.

X세대들이 힙합바지에 흑인 특유의 댄스를 펼치며 '스타 탄생' 의 꿈을 키우는 곳이 될 법도 하다.

열린광장의 이벤트를 보고 나서 색다른 휴식공간을 원한다면 지하매장으로 발길을 옮길 수 있다.

그곳에는 서점이 있다.

서가가 눈높이에 있어 그 뒤에 숨기는 불가능해 약간은 불안하다.

그럴 경우 매장에 마련된 소파에 앉으면 된다.

이때 커피 한잔이 생각난다면 '북카페' 로 옮겨 앉을 수 있다.

특별한 손님들만을 모시는 곳으로 착각하게 만들지만, 사실 모든 것이 '프리' 다.

커피를 마시고 나서 허전함을 느낀다면 다시 서가로 내려가서 보고 싶은 책을 빼내와 지적 욕구를 다둑일 수 있다.

다른 한편 책읽기보다는 세계와의 '리얼 타임 교신' 을 원하는 사람들을 위한 인터넷 카페가 지하 매장에 준비돼 있다.

최신 컴퓨터들이 가정보다 50배속 빠르게 네티즌 동지들을 불러준다.

주머니 사정을 약간은 고려해야 하지만, 시간과 공간을 압축해 주는 대가이니 어쩔 수 없다.

만약 신세대가 아니라면 이곳보다는 씨넥스라는 영화관이 나을 듯하다.

플라자의 주 (主) 모티프인 '물의 세계' 가 또 한번 이곳에서 변주된다.

이쯤에서 처음의 화두 (話頭) 로 다시 돌아가보자. 태평로 일대를 흔히 '삼성타운' 이라고 한다.

그 타운에 새로운 쇼핑센타가 들어선 것이 "뭐 대단한 일" 이냐고 할 사람도 없지 않다.

그러나 '공간' 을 소유하고자 하는 우리들의 원초적 본능 한구석을 채워준다는 점에서 굳이 이의를 다는 것은 소아병적 발상이 아닐까. 이제 더 이상 열린공간은 누구만의 것이 아니다.

누가 적극적으로 이용하느냐에에 따라 가치척도가 달라졌다.

삼성본관 뒤 '타임파크' 에 서면 멀리 남산이 보인다.

남산의 소나무들이 이곳까지 원정 온 걸까. 솔솔 솔냄새가 타임파크에 운무 (雲霧) 처럼 내려앉는다.

최영주 편집위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