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정권보다 깨끗했다더니 … ‘폐족’ 위기 몰린 친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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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전 대통령의 최측근인 민주당 안희정 최고위원은 2007년 대선 직후 “친노는 폐족(廢族·조상이 큰 죄를 지어 벼슬을 못하게 된 자손)”이라고 말했다. 그는 친노의 재기를 다짐하는 의미에서 ‘폐족’이란 반어법을 썼다 한다. 하지만 7일 노 전 대통령이 사과문을 발표하면서 친노 그룹은 문자 그대로 폐족의 위기에 몰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정권을 내준 뒤에도 친노 그룹이 대오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이전 정권보다 우린 깨끗했다”는 도덕적 우월감 때문이었다. 그러나 노 전 대통령의 사과문은 그런 자신감에 근본적인 물음표를 던지고 있다.

7일 노무현 전 대통령의 사저가 있는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에 노 전 대통령의 사진이 인쇄된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노 전 대통령은 정상문 전 비서관이 박연차 회장으로부터 수억원을 건네받은 혐의와 관련, 홈페이지를 통해 ‘사과드립니다’라는 제목의 글을 올렸다. [연합뉴스]

친노 그룹은 사과문 발표 소식에 당황하면서 말을 아꼈다. 백원우 의원은 “구체적 상황을 살펴보기 전에 뭐라 말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서갑원 의원은 ‘노 코멘트’로 일관했다. 친노 쪽의 한 인사는 “노 전 대통령이 돈받은 사실을 인정하면서 친노 그룹 전체가 도매금으로 넘어갈까봐 걱정”이라고 했다.

친노계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고 있다. 박연차 수사로 이광재 의원은 구속됐고, 서갑원 의원은 검찰 조사를 받았다. 지난 정부 때 옥고를 치렀던 안 최고위원은 이번엔 강금원 창신섬유 회장에게 10억원의 불법 정치자금을 받은 혐의로 다시 수사선상에 올랐다.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박정규 전 민정수석, 정상문 전 총무비서관 등 노 전 대통령 주변 인사들이 줄줄이 구속됐거나 체포된 상태다. 당내에선 “앞으로 친노란 이름이 정치권에 발붙이기 어려운 상황이 될지도 모른다”는 말이 나온다.

당 지도부는 이번 파문과 거리를 두려 한다. 노영민 대변인은 “노무현 대통령이 밝힌 대로 조사 과정에서 사실이 밝혀지길 기대한다”고 했다.

친노의 몰락은 당내 역학관계에도 상당한 변화를 가져올 공산이 크다. 친노 그룹은 정세균 대표 체제를 지탱하는 한 축이었다. 실제로 최근 전주 덕진 재선거 공천을 둘러싸고 정세균 대표와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이 충돌하는 과정에서 친노 그룹은 정 대표를 지원했다. 만약 정 전 장관이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될 경우 정세균 체제는 위기를 맞을 수 있다. 또 29일 재·보선을 앞둔 민주당엔 이번 파문이 ‘핵폭탄급 악재’(수도권 3선 의원)로 작용할 수 있다는 우려도 퍼지고 있다. 정 대표는 사과문 발표를 보고받고 큰 충격을 표시했다고 한다.

백일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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