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대그룹 기조실장 긴급회의 발언록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3면

"정부는 말로만 대책이지 실천이 없다." "점진적 대책보다 당장 초단기 대책이 필요하다." "은행.기업의 부도를 막지 못하면 공멸뿐이다." 30대그룹 기획조정실장들은 27일 서울여의도 전경련회관에서 정해주 (鄭海주) 통상산업부장관을 초청해 가진 긴급회의에서 격앙된 목소리로 우리 경제에 대한 절박한 위기의식을 숨김없이 쏟아냈다.

기조실장들은 "우리 경제는 10년정도 분에 넘치는 생활을 해왔다" 며 "앞으로 7~8년 허리띠를 졸라매지 않고는 경제회생이 어렵다" 고 입을 모았다.

다음은 비공개로 진행된 이 회의 발언내용.

▶H사 L부회장 = 기업 현실은 통산부에서 설명한 지표와 달리 정말 어렵다.

수치가 괜찮다고 믿고 있다간 이 난국을 벗어나기 힘들다.

7~8년 허리띠를 졸라매는 노력 없이는 위기를 극복하고 후세에 든든한 기반을 넘겨주기 어렵다.

지표가 이러니까 어떻다는 식의 안일한 생각을 벗어던져야 한다.

▶D사 P부사장 = 기업 구조조정의 걸림돌에 대해선 여러 경로를 통해 말씀드렸다.

문제는 아직도 달라진게 없다는 것이다.

근본적인 개선이 어렵다면 한시적인 유보조치라도 나와야 한다.

한계사업을 합병하려 해도 현재의 제도아래에서는 최소 2년이 걸린다.

합병시 이월결손금 승계가 안되고 자산취득에 대한 등록세 부담도 무겁다.

▶H사 P부회장 = 금융기관들이 기존 대출금을 무차별 회수하고 5대 그룹을 제외하고는 기업어음 (CP) 매입을 해주지 않고 있다.

연장도 안해준다.

한보에 건설공사비 5백억원이 물려있는데 대기업이라는 이유로 지원대상에서 제외됐다.

기아에도 계열사의 부품납품대금이 4백억~5백억원 물려있다.

한보.기아에 물린 것은 대기업이라고 제외시키고 금융기관에선 5대 그룹이 아니라고 대출도 안해주니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살아남기 위해 파격적인 구조조정을 하려고 하는데 정리해고가 안돼 노조와의 타협이 관건이다.

정부가 아무리 은행장이나 종금사 사장을 불러 기업을 도우라고 지시해도 듣지 않는다.

신문에만 나고 실제로는 안되는 것이다.

금융시스템의 붕괴를 막기 위해선 지시나 건의만 할 것이 아니라 긴급명령이라도 나와야 한다.

▶H사 L전무 = 기업이 해외에서 자금을 끌어오는 유일한 방법은 수출밖에 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수출착수금에 대한 규제가 많아 외화조달의 길이 막혀 있다.

실제로 종합상사는 수출착수금을 받을 수 있으나 제도상의 제약 때문에 못받고 있는 실정이다.

▶鄭장관 = 수출착수금에 대해서는 재경원과 협의해 제약을 없애겠다.

▶D사 N상무 = 은행이 제역할을 못하고 있다.

수출환어음에 대해 금융기관이 매입을 거절하고 대출약정에 따른 상환기간 연장도 거절하고 있다.

▶S사 S부회장 = 실물경제는 괜찮다고 하지만 실물경제의 주체인 기업이 다 죽어가는데 어떻게 실물경제가 좋다고 얘기할 수 있는가.

초단기적으로 은행의 부도를 막아주고 그 다음에 기업에 구조조정.전문화를 요구해야 한다.

기업이 살아야 금융기관도 산다.

아무리 미워도 30대 그룹은 실물경제의 주체다.

5대 그룹만 살려놓고 나머지는 다 죽어도 좋다는 말인가.

기업과 정부가 하나가 돼 기업을 살려내야 한다.

▶鄭장관 = 경제계의 위기는 기업만의 잘못이 아니라 정부.기업.가계 모두의 책임이다.

정부부터 생산성을 늘리고 가계도 절약해야 한다.

명목임금 상승률이 15%라는 것은 엄청난 거품임을 알아야 한다.

한계사업 정리에 2년이 걸린다는데 이런 상황에서 기업에 구조조정하라고 할 수 없다.

정부도 반성하고 있다.

노동시장 유연성은 어떤 형태로든 확보해야 한다.

이것 없이 기업이 어떻게 다운사이징을 하겠는가.

보완대책이 있어야 사회적 문제를 줄일 수 있다.

이영렬.심재우.김영훈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