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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의회 청문회를 보고 배워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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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7면

주인공은 72년 민주당 부통령 후보를 지낸 사전트 슈라이버(93). 케네디의 누이동생 유니스(87)의 남편이며, 아널드 슈워제네거 캘리포니아 주지사의 장인인 그는 지금 자랑스러운 과거를 기억하지 못한다. 알츠하이머병(AD)을 앓고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모든 상·하원 의원의 이름을 알았습니다. 그들의 경력과 관심사, 심지어 약점까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이젠 딸이 누구인지도 모릅니다.”

슈워제네거의 아내 마리아 슈라이버가 3월 25일 상원 고령특위 청문회장에서 이런 증언을 했을 때 청중석에선 여러 명이 눈물을 훔쳤다. 마리아는 “알츠하이머는 우리 기억을 삼켜버릴 뿐 아니라 가족에 큰 고통을 주며, 사회의 건강시스템을 파괴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이 주는 피해는 경제위기로 인한 것보다 더 심각할 것”이라며 예방과 치료를 위한 국가적 투자 확대를 촉구했다.

‘알츠하이머 스터디 그룹(ASG)’이 특위에 제출한 보고서에 따르면 현 추세가 지속될 경우 2050년 미국에는 AD 환자가 지금보다 네 배 많은 1600만 명에 달할 전망이다. AD 환자를 돌보는 데 들어가는 연간 비용은 1조 달러로 급증할 것이라고 한다.

ASG 공동회장인 뉴트 깅리치 전 하원의장은 청문회에서 “한 사람의 AD 발병 시기를 5년만 늦춰도 2010∼2050년 8조9000억 달러를 절약할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과거의 ‘맨해튼 프로젝트(핵무기 개발계획)’ 같은 국가적 투자가 AD 대책 마련에 이뤄져야 한다. 50년대 미국에선 매년 5만 명 이상이 소아마비에 걸렸지만 백신 개발 이후 근절된 만큼 이젠 AD 예방약을 만들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특위 청문회를 지켜보면서 AD 문제의 심각성을 처음 깨달았다. ‘미국이 예방약을 개발하면 박수도 받고 대박도 터뜨리겠구나’라는 생각도 했다. 미 의회 청문회장에 가면 이처럼 지식이 쌓이고, 눈(目)이 열린다. 이날 하루 상·하 양원에선 18개의 청문회가 개최됐다. AD 외에 국제 경제위기와 외교, 대중교통, 건강보험 등의 주제가 다뤄졌다. 어떤 것을 들었어도 배움은 컸을 것이다.

워싱턴엔 한국 의원이 많이 온다. 미국 정치인과 행정부 관리, 한반도 전문가를 잠깐 만나고 나면 볼 일 다 봤다고 여기는 경향이 있는 그들에게 청문회장을 찾아보라고 권하고 싶다. 미 의회의 문제의식이 한국 국회와 얼마나 다른지, 한국에서 보내는 정쟁의 세월이 얼마나 아까운지 실감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상일 워싱턴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