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에메랄드 궁전의 추억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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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43면

이예린이 촬영팀과 함께 오피스텔에 당도한 건 오전 아홉시 십분 경이었다.

그때 나는 출발 준비를 끝내고 소파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열어둔 발코니로부터 부신 아침 햇살과 신선한 대기가 밀려들어 모처럼 머리속이 맑게 정화되는 것 같았다.

그래서 쇼팽의 느린 건반음을 들으며 나는 끈끈한 인연의 힘, 내가 관통하지 않으면 안 될 미지의 공간을 머리속으로 그리고 있었다.

형식적으로는 과거를 찾아가는 기행이 시작될 참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그것이 전혀 다른 미지의 공간을 찾아가는 기행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님, 저 지금 오피스텔 로비에 와 있어요. 설마 아직까지 주무시고 계신 건 아니겠죠?" 아홉시 십분, 벽시계를 올려다보며 나는 이예린이 걸어온 전화를 받았다.

"커피를 마시고 있는데…이불 속에서 커피를 마시는 사람도 있소?

어쨌거나 오분 이내에 내려갈 수 있을거요. 그런데, 내 차를 가져가도 되겠소?" "선생님 차?…음, 그게 더 편하시다면 그렇게 하세요. 제가 동승해 드릴 테니까요. " 전화를 끊고 나서 나는 준비해 두었던 감색 사파리를 입었다.

그리고 전화기의 자동 응답보턴을 누르고 나서 열어 두었던 발코니 문을 닫았다.

그런 뒤에 건성으로 그러듯 실내를 한바퀴 휘둘러보았는데, 이상하게도 그 순간 내가 몸 담고 살아온 그 공간에서 아뜩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요컨대 현실과 과거가 분리되는 마지막 경계 지점에 내가 서있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날씨는 정말 좋은데, 선생님 기분은 어떠세요?"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로비로 나서자 촬영팀으로 보이는 네 명의 남자와 대화를 주고받던 이예린이 총총히 내쪽으로 다가오며 밝은 표정으로 웃어보였다.

일이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걸 고지하듯 평상시의 단정한 차림새와 달리 그녀는 보기좋게 물이 바랜 청바지에 푸른 줄무늬의 남방, 그리고 여러 개의 주머니가 달린 베이지색 조끼를 걸치고 있었다.

그리고 목에는 줄이 달린 펜이 걸려 있었고 손에는 촬영 구성안인 듯한 인쇄물이 들려 있었다.

"내 기분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이 피디만큼은 좋지 않을 거요. 내가 이 피디와의 게임에서 보기좋게 패배했다는 걸 오늘 아침에야 깨닫게 되었으니 그 기분을 말해 뭣하겠소. 아무려나 이제 남겨진 일은 이 피디 하기에 달렸다는 거…그 정도야 물론 알고 있겠죠?" 손에 들었던 가방을 어깨에 걸치며 나는 농담 반 진담 반의 어조로 말했다.

"촬영 일정이 빠듯해서 그렇지 다른 건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리고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긴장감 때문이라는 것도 알아요. 그러니까 그냥…뭐랄까, 선생님 영혼의 고향을 찾아간다고 편안하게 생각하세요. 우울하고 쓸쓸하게 혼자 가시는 것도 아니고, 저처럼 선생님을 잘 이해하는 사람하고 같이 가는 데 뭐가 걱정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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