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국인 주식투매 사태, 자동 매매 프로그램이 주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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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8면

"20%넘게 손해 보면 무조건 판다."

최근 국내 대형우량주를 집중매도해 주가폭락을 주도하고 있는 외국계 투자펀드들의 한 운용지침이다.

구미선진국 투자가들이 폭락장세속에 막대한 손실을 아랑곳 않고 '팔자' 주문을 연일 쏟아내는 데엔 이처럼 독특한 자동매도프로그램이 한몫 단단히 하고 있다.

바로 규정에 따른 '스톱로스' (Stop Loss.손절매) 장치다.

스톱로스가 발동되는 주가등락폭은 펀드의 구성이나 투자대상국에 따라 편차가 크지만 대략 15~30%정도가 보통이다.

살로먼 브러더스 서울지점의 박동영 이사는 "펀드마다 스톱로스 비율이 다른데다 시장상황에 따라 그 수치도 변한다" 면서 "투자대상국 증시에 민감한 영향을 끼치고 일종의 영업비밀에 속해 그 비율을 통상 대외비로 한다" 고 말했다.

미국의 세계적인 헤지펀드인 타이거펀드가 신흥시장을 겨냥해 아일랜드에 설립한 'TEI펀드' 가 최근 막대한 손실을 감수하면서 국내 주식을 대거 처분한 것도 스톱로스 원리에 따른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이 펀드는 지난 6, 7월 두차례에 걸쳐 국내 대표적 우량주의 하나인 LG화재보험의 지분 5.15% (22만3천여주) 를 매집했다가 네달만인 지난 22일 무려 37억여원, 30.2%의 손해를 보고 모두 팔아치워 버렸다.

이러한 스톱로스 규정은 펀드매니저의 자의성을 줄이는등 여러 장점을 갖춘 반면 시장상황에 따라 유사한 방향의 주문이 폭주케 함으로써 현물시장 주가를 극도로 불안하게 만드는 악영향도 있다.

최근의 국내 주가폭락도 아시아권과 한국에 대한 외국인들의 투자비중 하향조정과 환차손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리 이외에도 외국계 펀드의 스톱로스가 크게 작용한 것이란 견해가 많다.

87년10월 뉴욕증시가 '블랙먼데이' 를 맞았을 때도 일정 비율 이상 주가가 떨어지면 처분한다는 투자관행이 주가폭락의 악순환을 불러일으킨 바 있다.

선진국 투자펀드는 우리와 달리 주가하락으로 인한 주식평가손을 끌어 안은채 전전긍긍하기보다 이처럼 훌훌 털어버리는 것을 제도화하고 있다.

펀드에 돈을 댄 투자자들의 환매요구가 발동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투자손실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우리나라 기관투자가들의 경우 선진국과는 달리 주가에 상하한가폭이 정해져 위험에 어느정도 대처할 수 있기 때문에 이러한 손절매 전략을 사용하지 않고 있다.

동아증권 김영종사장은 "스톱로스 기법은 미국처럼 주가가 기업이나 경제의 내재가치를 잘 반영하고 거래관행이 투명한 시장분위기에서 효과가 크지만 유동성이나 특정한 재료에 따라 주가가 춤추기 쉬운 우리나라 같은 시장에서는 정착되기 어렵다" 고 지적했다.

홍승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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